매주 수요일 연재 | 브런치북: 가족여행의 기술
여행 11일째.
처음의 설렘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체력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무리한 강행군 끝에 결국 다리에 찰과상을 입고 절뚝이셨다.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는 일이, 마치 여행의 작은 의식처럼 반복되었다.
어머니는 기침과 가래로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지럼증이 찾아올 때마다 길가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다시 천천히 일어나 걷기를 반복했다.
남동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목이 부어오르며 인후염이 시작됐고, 목소리는 모래를 씹은 듯 갈라졌다.
나와 남편은 누적된 피로 탓에 서로 말을 아꼈다. 배려라기보단, 더는 힘을 들여 말을 걸고 답할 에너지가 없었던 것 같다.
새로운 경험은 분명 신비로웠다. 하지만 그 낯섦을 받아들이려면 몸과 마음은 늘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낯선 음식, 예기치 못한 변수, 빡빡한 일정은 설렘과 피로를 동시에 몰고 왔다.
결국 여행은 늘 이 두 가지의 줄다리기였다.
낯섦이 주는 설렘과, 그 낯섦을 견디기 위한 긴장.
“이 방 마음에 안 들어.”
“향수병 생긴 것 같아.”
“왜 내 말을 무시해?”
날카로운 말들이 오갔다. 피로가 감정을 잠식하면, 여행은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니라 버티기에 가까웠다.
그런데 묘하게도, 막상 여행이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반가움보다 아쉬움이 먼저 밀려왔다.
“벌써 내일이면 여행 끝이라니.”
“그래도 무사히 마쳤네. 다들 고생했어.”
어느새 서로에게 짜증 내던 장면들이 마치 편집 버튼 눌러 지워진 것처럼 흐릿해졌다.
결국 여행의 공식은 단순했다.
'힘들 땐 투덜대고, 끝날 땐 아쉬워한다.'
이게 바로, 대가족 여행 불변의 법칙이었다.
라스베가스의 어느 저녁, 샤워실에서 한 여자의 호들갑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혹시 밖에 내 수경 있어?”
“없는데. 잘 찾아봐.”
“아악, 나 수영장에 두고 왔나 봐!”
“어휴, 넌 안경, 수경은 아예 사질 말아라.”
수경 분실로 시작된 소동은 곧 지난 선글라스 분실 사건까지 소환하며 잔소리로 번졌다.
“지금 몇 시야? 폐장 전에 찾아와야 되는데…”
당장 나설 수 없는 여동생 대신, 아버지가 의외로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찾으러 가마.”
내가 놀란 얼굴을 하자, 아이가 곧장 덧붙였다.
“할아버지만 가면 안 돼. 내가 같이 갈래.”
그렇게 20분 후, 당당히 수경을 찾아오겠다던 콤비가 감감무소식이었다.
따르릉—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 우리 지금 수영장에 갇혔어. 근데 괜찮아, 곧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갇혔다고? 왜?”
“수영장 문이 닫혔어. 그리고… 수경은 못 찾았어.”
“괜찮으니 그냥 올라와.”
돌아온 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영화와도 같았다. 호텔 복도와 계단을 헤매다 결국 폐장 시간에 걸린 두 사람은 수영장층의 문이 잠겨 발을 동동 구르던 중, 퇴근하던 보안요원을 만났다는 것이다. 직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이유를 묻자, 아이가 재빨리 나섰다.
“우린 수경을 잃어버려서 찾으러 왔어요. 도와줄 수 있나요?”
뜻밖의 당돌함에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문을 열어주며 담당 직원까지 불러주었다. 비록 수경은 끝내 찾지 못했지만, 그 순간 아버지의 마음은 벅차올랐다.
“이젠 내가 손녀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손녀가 날 지켜주네. 참 대견하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한동안 멍해졌다.
언제부턴가 의지하던 아버지는 조금씩 약해지고, 어린 줄만 알았던 아이는 누군가를 보호할 만큼 자라 있었다. 아이의 성장이 곧 아버지의 쇠약함이라면, 세월이란 참으로 야속한 것이다. 하지만 그 무상함 속에서도 세대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삶의 진실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그 많던 시간도 결국 다 사라졌다.
다툼도, 웃음도, 컵라면 냄새도 다 지나갔다.
시간은 아이를 어른답게 만들었고, 어른은 조금 더 아이처럼 의지하게 했다.
결국 여행은 시간을 나누는 일이었다.
그 사이, 우리는 함께 늙고, 또 함께 자라났다.
짧은 여섯 편의 이야기를 전하는 동안, 제 글을 선보일 수 있다는 기대에 설레었고, 보내주신 반응에 아이처럼 기뻐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계셨기에 끝까지 끈기 있게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걸음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함께 웃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