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울제가 없는 삶

장기간의 우울증 치료 후 지금은

by 늘연

우울증을 오랫동안 앓다 보면 증상이 심했을 때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정서적으로 힘들 때마다 써 내려갔던 일기들도 보고 싶지 않아 모두 버렸다. 기록을 버렸을 때는 아마도 힘든 기억은 모조리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을 테다. 분명한 건 현재는 과거에 비해 많은 것이 나아졌다. 무엇이 변했다고 느끼는지 기록해보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어릴 적부터 당연하게 숨쉬 듯이 마음이 건강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내가 겪었던 어려움을 비슷하게 경험 중일 수도 있다. 우울증 치료 전 후에도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반드시 답이 있다고 여기고, 그 어려움마저 인생이 나에게 주는 과제로 여기고 풀어나가야 한다는 거다.




1. 유연하게 받아들이기

과거엔 매사에 모든 것이 나를 화나게 했다. 모든 것이 답답했고 괴롭게 만드는 요소들이었다. 길을 가다 예상치 못하게 누가 길을 막는다던지, 물건만 떨어뜨려도 우선 분노부터 일어났다. 일을 할 때도 함께 일하는 동료의 결과물을 다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해진 것이 있다면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극도로 불안해했다. 말랑말랑하게 생각해도 괜찮았을 순간이 수십 수백 번 떠오른다. 지금은 세상사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있을 리가 없지 하는 마음인 듯 쉽게 화가 나지 않는다.


2. 감정을 눈치채기

병원에 다니면서 문장완성검사를 해본 적이 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은 눈치 보는 것이라고 썼었다. 타인과 그 조직의 분위기를 귀신같이 읽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능숙했다. 정작 정신과 치료를 시작하고 나서 나라는 사람의 감정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가을날의 시원한 바람이 부는 맑은 하늘을 마주했을 때였다. 그때 느껴지는 감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이 십 년 넘게 외면해 온 내면의 소리를 말이나 글로 표현해 내는 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구체적인 감정 단어를 사용해서 감정을 표현하곤 한다.


3. 금주와 금연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음주, 흡연, 불규칙한 생활패턴은 정신건강에 백해무익하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젊은 시절 음주를 즐겼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쉽게 손에 쥘 수 있는 것으로 공허한 내면을 채울 수 없었고 또렷한 각성상태가 짐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술에 취한 기분을 즐겼던 것 같다. 하지만 금주 필요성을 느꼈음에도 술에서 손을 뗀다는 건 쉽지 않았다. 과도한 음주 후 다음날 아침이 너무도 힘들었다는 걸 되뇌며 인터넷상에서 '금주 100일 챌린지'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때 처음으로 몇 달간의 금주를 성공했다. 다시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그 이후 금주 기간을 늘려가는 식으로 술과 점점 멀어졌다. 지금은 알쓰(알코올 쓰레기-술에 약한 사람)가 되어 술과 멀어지고 말았다.


4. 아버지와의 관계 개선

우울증과의 사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던 건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어릴 적부터 언제나 대립하는 관계였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아버지의 태도가 나의 큰 스트레스 요인이었다. 아버지가 눈에 보이면 화부터 났다. 기침 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두근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정신과 진료 중 의사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늘연씨는 아버지와 친해지고 싶었나 봐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빙긋 웃어주신 기억이 남아있는데, 조용히 그 말에 대해 생각하며 진료실을 나왔다. 그 이후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간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던 나는 정신과 간호사가 된다면, 내 주치의 선생님처럼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런 통찰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유일한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