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심이라고 외치는 사회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좌표계 속에 산다.
지금 나의 눈에 비친 세상이 '정상'이고,
내가 느낀 감정이 '객관'이라고 믿는다.
내로남불.
그 믿음은 때로 자기 확신의 힘이 되지만,
더 자주 타인를 부정하는 기준이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지금,
각자의 중심이 충돌하는 다중 관측자의 세계다.
특수상대성 이론이 말하듯,
움직이는 관찰자마다 시공간은 다르게 경험된다.
이 이론의 핵심을 다름의 인정에 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그 반대다.
모두가 자기만 옳다며, 나머지를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관찰자가 많아질수록
기준은 흔들리고, 중간은 사라진다.
'보편', '중도', '평균'이라는 말은 점점 낡은 단어가 되고,
대신 '극단적 확신'과 '신념의 경쟁'이 일상 언어로 자리 잡는다.
지하철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옆 사람은 눈살을 찌푸리고,
전화 받는 사람은 '급한 일인데 뭐가 문제야?'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옳다고 확신한다.
공감은 사라지고, 공진만이 남는다.
비슷한 감정과 유사한 분노가 만나며,
사회는 파열음을 키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이상한 결론에 닿는다.
심리학은 이런 현상을 '자기중심적 편향'이라 부른다.
우리는 세상의 중심이 '나'라고 느끼는 구조 속에서 생각한다.
하지만 이 구조의 해체는, 우리를 공황상태에 빠뜨린다.
타인의 언어가 낯설고,
타인의 감정이 위협적으로 느껴지며,
결국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지우기 위해
더 강하게 자신을 주장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올리는 온라인 댓글창.
누군가 자신의 의견을 올리면,
찬성하는 사람들은 '맞다 맞다'를 외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말이 안 된다'고 응답한다.
여기에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또 하나의 심리가 개입된다.
나의 감정은 언제나 정당하며,
나의 입장은 언제나 피해자라는 믿음.
그 믿음은 타인을 쉽게 가해자로 만들고,
결국 서로가 서로를 향해 '내가 옳다'고 외치는 전투가 벌어진다.
더는 대화가 아니다.
더는 관계도 아니다.
이제는 충돌이며,
그 충돌은 진동이 되어 사회 전체를 흔든다.
칸트는 인식이 곧 세계의 구조라고 보았다. 우
리가 보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지각과 범주의 필터를 거친 '나만의 세계'다.
칸트의 인식론은 겸손을 요구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집을 가득채워,
'나의 인식만이 옳다' 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라 불렀다.
나란 존재는 언제나 세계 속에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지금은 그 세계가 폐쇄되고 있다.
비슷한 말만 오가는 알고리즘,
내가 선택한 정보,
내 취향만 모인 소셜네트워크.
그 안에서 우리는 다양한 존재가 아니라,
단지 더욱 세분화된 동일성의 군집으로 분열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좌표가 중심을 주장할 때,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심이 없는 사회는,
파동만이 부딪히는 공진의 공간이 된다.
공진은 구조 붕괴의 시작이다.
공감 없이,
소통 없이,
이해 없이 퍼지는 감정의 증폭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취약한 부분부터 흔든다.
이제는 '나만 옳다'는 확신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다를 수 있다'는 인식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한번쯤 이런 질문들을 던져 보면 어떨까.
나는 지금 이 말을 정말 상대방에게 전하고 싶어서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 안의 무언가를 확인받고 싶어서 하는 것일까.
내가 분노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상대방이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 언어의 문법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고 노력 했을까.
카페에서 아이가 시끄럽게 울고 있다.
나는 '저 부모는 왜 아이를 그냥 놔둘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잠시 멈춰서 생각해본다.
저 부모도 지금 당황스럽고 미안할 것이다.
아이가 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떨까.
이런 작은 상상의 연습이 쌓일 때,
우리는 소리치지 않아도 들릴 수 있는 사회에 조금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그리고 학교는 그런 연습의 첫 번째 무대다.
아이들이 처음 타인과 마주치는 그 공간에서,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탐구할 수 있다.
지금 네 마음이 어떤지,
친구가 왜 그런 말을 했을지,
다툼이 일어났을 때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빨리 배운다.
다름을 신기해하고,
궁금해하고,
때로는 무서워하지만 그래도 다가가려 한다.
이런 질문들은
아이들의 말 속에서,
표정 속에서,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진동하며 삶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다시 '중간'을 배워야 한다.
침묵 속에서도 진실이 자랄 수 있다는 믿음,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인식,
그리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 그
것이 보편의 회복이고,
다양성의 뿌리이며,
관계의 물리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위한 매질이다.
그 매질이 없으면, 진동은 퍼지지 않는다.
소리가 공기를 통해 전해지듯,
마음도 사람을 통해 전해진다.
그 전달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한 증폭기가 아닌,
필터이자 번역기가 되어야 한다.
거친 진동을 부드럽게 만들고, 날카로운 소리를 따뜻한 울림으로 바꾸는 것.
이 혼란의 시대에 가장 지혜로운 일은 어쩌면,
먼저 내 안의 소음을 줄이는 것일지 모른다.
내 안의 소음을 줄이고 나면,
비로소 나는
조용히 울리는 타인의 떨림을,
그리고 그 떨림이 전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