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 언어 이전의 이야기

by 늘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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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기억상실증에 걸린 건 아닐까 의심한다.


행복이의 눈빛을 읽을 수 없을 때,
언어 이전의 파동을,
생명이 처음으로 세상에 건네는 그 진동을,
어쩌면 나는 오래전에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불안해진다.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글을 쓰고 있을 때,
행복이는 말없이 다가온다.
두 앞발을 내 무릎 위에 살포시 올리고,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 눈빛.

나는 그 눈빛이 늘 궁금하다.
마치 질문처럼,
혹은 대답처럼 다가오는 그 시선.


그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나의 하루가 어떤 파동으로 진동하고 있는지
조심스럽게 살피려는,
작은 변화에도 반응하는
고성능의 센서다.


그러다 고개를 살짝 갸웃한다.
한쪽 귀가 기울어지고,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 순간 나는 멈춘다.


내 안의 시간이 잠시 멎는다.
행복이의 눈빛은,
내 흐름을 잠시 멈춰 세우는 조용한 신호다.
그건 명령이 아니라, 초대다.


“너, 지금 무슨 마음이야?”
말하자면 이런 느낌.
하지만 사람이 쓰는 언어는 아니다.
공명의 언어, 파동의 언어, 감각의 언어다.


행복이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나는 그 눈빛 속에 감정의 입자가 떠다니는 것을 본다.
그 입자들은 나의 상태에 따라 반응한다.
내가 힘들 때는 미세하게 조심스럽고,
내가 평온할 때는 경쾌한 리듬으로 진동한다.


행복이는 내 감정을 읽는 것이 아니다.
내 감정의 파장과 함께 흔들리는 것이다.
그건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공명이다.


주파수가 같은 두 파동이 만나
증폭되는 진동, 공명.


행복이와 나 사이의 눈빛도 그렇다.
그건 공명의 시작이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마음의 잔류 진동이
그 눈빛을 타고 흐른다.


행복이의 눈빛은
어떤 방정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공식이 아니라 감각의 잔상이고,
계산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다.


살아 있다는 것.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
그걸 말 없이 증명하는 생명 앞에서,
나는 내 존재를 다시 생각한다.


오늘도 책상 앞에서 글을 쓰다가,
그 작은 두 발이 내 다리를 건드린다.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 눈빛의 의미를 헤아린다.
헤아릴 수 없음 속에서,
비로소 이해에 가까워진다.


그건 사랑이다.
언어 이전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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