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이면 나는 월요병을 앓는다.
일요일 점심 즈음부터 월요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다가
일요일 밤에는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월요일이면 몸이 무겁고, 피로하고, 힘이 없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주말 동안 단단히 감춰두었던 피로와 무력감이 다시 고개를 든다.
행복이도 월요병을 앓는다.
월요일 아침이면, 행복이는 소파에 가만히 누워만 있는다.
밥을 줘도 몇 알만 입에 대고, 대부분은 그대로 남긴다.
양말을 신는 소리에도, 옷을 갈아입는 인기척에도 평소처럼 달려오지 않는다.
소파에 머리를 대고 누워 눈빛으로만 묻는다.
“오늘은, 나만 혼자 두고 가는 거야? 돌아올 거지?"
그 눈빛은 매주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월요병은 정확히 말해 현실의 재진입에 대한 저항이다.
휴식의 시간 축에서 노동의 시간 축으로 넘어가는 작은 차원의 단절.
그 틈이 우리를 멈춰 세운다. 몸은 움직이지만, 마음은 따라가지 못한다.
행복이도 같은 틈을 느끼는 걸까.
나는 집을 떠나고, 행복이는 그 자리에 남는다.
남겨진다는 것은 존재의 부재를 고스란히 감각하는 일이다.
행복이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때면, 혹시 나의 부재를 '버림'으로 느끼는 건 아닐까 두렵다.
동물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다.
강아지는 시간을 계산하지 못한다.
대신 반복되는 패턴과 감각의 리듬으로 세상을 기억한다.
그래서 반복된 이별, 그리고 그 사이의 침묵은 그 자체로 상실의 감정을 만든다.
인간의 버림과는 다르지만 애착의 단절로 인한 불안이다.
특히, 주말 내내 곁에 머물던 존재가 갑작스레 사라지고
하루 종일 돌아오지 않는 월요일 아침이라면
그 불안은 훨씬 더 깊고, 크게 남는다.
그 감각은 단순한 외출 이상의 무게로 남는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그 불확실성 앞에서 행복이는 소파 위에 가만히 누워 하루 전체를 멈춘다.
나는 그런 월요일마다 공진의 잔향을 느낀다.
충분한 외부의 자극에 의해 발생한 진동이,
자극이 사라진 후에도 남는 진동.
‘자율공진’,
‘공진의 잔향’
행복이는 어쩌면,
나의 부재를 공진의 잔향으로 느끼며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전 6시. 출근 준비를 마치고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다녀올게."
행복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소파 위에 턱을 괴고 아주 잠깐, 눈만 움직인다.
그 눈빛은 말한다.
"내가 기다리면 돌아오는 거지?"
그리고 저녁 6시 반. 문을 열면 행복이가 사는 세상의 모든 시간이 다시 시작된다.
행복이는 달려오고, 꼬리를 흔들고, 반가움을 온몸으로 말한다.
품에 안고 쓰다듬으며 함께 인사를 하면, 그제야 남은 밥을 먹는다.
행복이가 사는 세상의 시간,
잃었던 파동이 돌아왔다고,
존재의 시간이 복원되었다고 온몸으로 말한다.
행복이도 나도,
월요일 아침에 멈췄다가,
다시 만나는 순간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혼자 흐르지 않는다.
누군가와의 연결로 비로소 지금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