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춘복양이 되었어요

행복이와 나의 사춘기

by 늘람
DALL·E 2025-06-07 17.10.45 - An 8-month-old beagle puppy sitting happily in a slightly messy room with a few scattered toys. The beagle has floppy ears, big brown eyes, and a brig.png

사료를 거부한다.

이름을 부르면 오히려 고개를 돌린다.

좋아하는 놀이를 하다가도 내 말을 무시한다.
밤에 잠은 안 자고 장난감통 뒤져 방 안을 온통 장난감으로 덮어 놓고,
갑자기 침대에 뛰어올라 얼굴을 핥으며 깨운다.


행복이 안에 있던 파동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개춘기.

말로만 듣던 그 단어가 행복이 안에서 진동하기 시작했다.


질서와 혼돈은 늘 손을 잡고 움직인다.

성장도 그 두 흐름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하지만 균형이란 고정된 상태가 아니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진동의 중심이다.


행복이에게 개춘기가 찾아왔다.

행복이가 개춘복양-개춘기에 걸린 행복이-이 되었다.

그걸 깨닫기까지는 며칠이 채 걸리지 않았다.


첫 이상함은 아침 사료를 줄 때였다.

평소 같으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던 행복이가,

그날 아침엔 사료그릇 옆으로 다가오다 말고 고개를 돌려 소파에 올라가 버렸다.


문득 내 사춘기 시절,

한동안 먹을 생각조차 들지 않고,

금방 행복했다가, 다시 금방 우울해졌던,
그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몸속에서 무언가 새로 태어나려는 순간,

기존의 질서가 깨지고 새로운 평형을 찾아야 하는 시점, 사춘기.


생명은 열린 시스템이다.

고요한 강물처럼 일정한 리듬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폭풍 치듯 때로는 파동의 마디가 어긋나고, 시간의 결이 뒤틀린다.

그 틈을 견디며 다시 리듬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성장이다.


며칠 전 산책을 나가려던 아침.
리드줄을 챙기며 하네스를 하기 위해 부르자, 행복은 소파에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다가가자 오히려 도망간다.

그리 좋아하던 행동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행동이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사춘기 시절.

부모의 목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지던 그 시절.

공명이 끊기고, 내 안의 고유한 리듬을 찾으려 애쓰던 시간들.


행복이도 지금 그런 공명의 어긋남을 겪고 있는 것일까.

생명은, 관계란 본래 완벽한 공명이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다른 파동으로 존재하며,

때로는 맞물리고 때로는 어긋난다.

그 틈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기다림 인지도 모른다.


새벽 한 시.

그날 밤, 열 시 조금 넘어 겨우 잠이 들었는데, 새벽 한 시경에 아내의 큰소리에 깨었다.

"이게 뭐야! 행복아!"

잠결에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 작은 장난감 상자들이 열려 있고,

방 곳곳에 장난감들과 종이봉투,

배변패드는 찢어져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행복은 그 한복판에 앉아 해맑게 나를 바라봤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비슷했던 것 같은데'라는 생각에...


중학교 시절,

밤새 책상 서랍을 뒤지고,

오래된 편지며, 사진들에

이런저런 나름 소중했던 물건들을 온통 늘어놓았던 기억.

그리고,

어머니의 한숨과

내 방안을 가득 채웠던 그 혼란한 감정들.


성장 중인 존재는 구조를 부수고,

경계를 흔드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재구성한다.

그 과정은 혼란스럽지만,

성장의 필연적 과정이다.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그리고 그 속에선 새로운 질서가 태어난다.


행복이의 하루는 얼마나 빠를까.

흔히 개의 일 년은 인간의 칠 년에 비유된다.

성장도, 회복도, 악화도 인간보다 훨씬 빠르다.

세포들이 빠르게 교체되는 존재에게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행복이의 하루는 나의 일주일의 밀도를 갖는다.

내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느끼는 동안,

행복은 이미 몇 번쯤 세계를 새롭게 살아냈을지도 모른다.


문득 안도감이 든다.

사람에게는 7년이나 걸리는 사춘기가 행복이에게는 1년 남짓의 시간이라니까.

이 혼란스러운 파동도 곧 새로운 평형을 찾을 테니까.


그리고, 한 편 슬프다.

행복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 7배 빠르게 흘러갈 테니까.


시간은 생명마다 다르게 흐른다.

어쩌면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각 존재가 자신의 리듬으로 구성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행복이와 나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우리에게 흐르는 시간은 빌딩의 다른 층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 거리, 그 어긋남은 수많은 오해와 기다림을 낳는다.


사춘기 시절.

그때의 나도 빠른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하루가 길고도 짧았고,

감정은 거칠게 부딪히며 흘러갔다.


부모와의 공명은 흐트러지고,

나만의 리듬을 찾아 헤매던 시간.

그 파동은 지금도 내 안에 잔잔한 잔향으로 남아 있다.


행복이가 지금 그 시간을 지나고 있다.


나는 행복이 곁에서 기다린다.

때로는 혼란스러운 새벽도,

무심한 시선도,

산책길의 갑작스러운 멈춤도,

행복이의 성장의 과정임을 알기에.


우리는 함께 질서와 혼돈의 파동 속을 걷고 있다.

그리고, 그 파동 속에서

서로의 이해는 깊어진다.


관계란 완벽한 공명이 아니다.

어긋남을 견디는 연습이다.

질서란 늘 불안정한 진동 위에 있다.


성장이란 예측 가능한 직선이 아니라,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양자적 도약이다.


그 도약의 순간마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한다.


나의 사춘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신적 사춘기.

나는 늘, 기존의 나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

나는 늘, 오늘보다는 조금 더 성장한 새로운 나로 태어나고자 한다.

그 불안정한 진동은 여전히 내 안에서 맥박 친다.

그래서, 오늘도 살아있음을 느낀다.


행복이와 나, 우리는 서로 다른 속도로 같은 파동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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