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열 살

'마흔'이라는 나이에 대한 생각

by 는개

대학생 때 졸업작품을 준비하면서 막연하게 생각했었어요.

졸업하고 방송 구성 작가든, 어느 드라마 작가의 문하로 들어가든 직업으로 '작가'를 하겠다고.

서른 즈음에는 정말 작가로 불리겠지, 그로부터 십 년 정도 더 면 작가로서 뭔가를 남기긴 했을 거야.

하고 꿈을 꾸면서.

그렇게 되고 나서


마흔에는

죽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땐 정말 비장하고 단호했어요.

오히려 그때 죽으려면 꼭 꿈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20대 때는 하루에 네 시간도 자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누군가 취직은, 결혼은, 아이는, 이러면서 미래를 얘기할 때면 저도 모르게 무심코 마흔에 죽겠다는 말이 송곳처럼 튀어나왔었어요. (엄마 앞에서도 한 번 그랬다가 등짝은 맞았지만......)


그 마음을 단단하게 숨겨와서 어느샌가 저에게도 보이지 않게 깊숙이 있었어요.

그러다 우울이가 저의 모든 일상을 지배하게 되고 우울증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다가 재발하면서

몇 년을 오늘만 사느라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무심코 불안성 우울증이라는 코드가 박힌 진단서. 그 이름 옆에 쓰여있는 숫자.

나의 나이테가 적힌 그 숫자 곁으로 갑자기 그 기억의 마음이 떨어졌어요. 그러더니 죽기 위해 열심히 살았었던 20대 때의 수많은 날들이 우박처럼 떨어지는 거예요. 그땐 죽겠다고 열심히 살았는데, 지금은 반대로 살고 있어요. 의무감으로 병원에 다니며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열 살 꼬마처럼 선생님이 그러면 안된댔으니까 죽으면 안 돼,라는 마음으로 오늘을 매일매일 보내고 있네요.


무기력, 무기질로 살고 있지만 졸업할 무렵의 저에게 면목이 없을 것 같아서 처음으로 마흔까지는 살아야겠다는 '목표'가 생겼어요.


매일매일을 죽고 싶은 마음과,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투쟁하면서

오늘만, 내일만, 금요일까지만, 주말만... 매일을 밀려오고 쓸려 나가며 갯벌 같은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숨이 있어야 할 날이 늘어나고 말았습니다.


하루, 일주일만 생각하고 해 봐야 보름을 생각하는 게 가장 길었는데 갑자기 십 년씩이 앞뒤도 없이, 뭉텅뭉텅 잘려 떠오르고 윤슬이 되어 눈이 부시게 만드니 너무 복잡하고 어지러웠어요.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이고,

비혼을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결혼도 했고.

생업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전혀 다른 일이고,

10대 때부터 쓰고 싶었던 필명으로 써낸 결과물들은 모두 디스켓과, USB와, 외장하드와 클라우드를 거쳐 지금은 전부 지워내고 내 노트북에만 남겨놨고.

지금도 나는 꿈꾸던 작가는 아니고.


매일매일을 일어나는 일들에 반응하며 살지만

언제까지나 오랫동안 살고 싶다, 해로하고 싶다, 같은 마음은 없고.


마흔

마흔

마흔


<만 나이 통일법> 이 시행되면서 세상이 혼란을 겪다 보니

어쩌다 마흔을 오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흔이라는 어른을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열 살짜리 어린아이로 살고 있는 기분이에요.

두 번째 열 살에는 꿈을 꾸고,

세 번째 열 살에는 투고를 하고, 생업에 매달리며 살았는데

네 번째 열 살인 지금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세상을 하나하나 다시 배워가고 있습니다. 지난 모든 시간들이 새롭게 보이고 있어요.


세상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마치 나침반 하나 달랑 들고 헤매는 기분이에요.


나침반 바늘이 흔들린다는 건 똑바로 가고 있다는 증거라는데,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을 걸으며 나는 너무 많이 혹되고 흔들립니다. 불혹은 이조시대의 말이고, 나는 조선시대가 아닌 대한민국 시대를 살고 있으니 그 '마흔'과 이 '마흔'은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나는 마흔을 걷는 게 아니라, 네 번째 열 살을 걷는 기분이에요.


나아가지 못하고 지난한 기억에 갇혀서 뱅뱅 돌기만 하다 이제는 지난 기억을 새롭게 걷고 있어요.

전진을 못할 거면 제자리라도 걸어야 하는데 후진하다 못해 퇴화하고 있는 것 같아요.


늘 이상과 현실의 나를 분리한 채로

허구를 전제로 한 이야기만을 쓰며 진실은 조각조각 숨겨놓기만 했던 내가,

한 번도 글 앞에서 솔직해본 적이 없는 내가,

그 무엇도 숨기지 않고 토해내듯 진실하게 써내는 건

우울이와 살면서 슬픔과 우울은 어디에도 있다는 걸 깨닫게 돼서입니다.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해 주민등록조차 없는 무국적자처럼 살아가고 있는 나, 그리고 당신.

혹시 나 같은 당신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덜 외롭기를 바라서.

세상을 품을 수가 없고 포함되지도 못한 저지대에 당신만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