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

이제야 나는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by 는개

몇 시간이고 혼자서

드라마를 봤다가 책을 보다가, 시집을 읽다가

휴대폰 게임을 하다가, 가만히 있다가

물끄러미 방 안 여기저기를 보다가

나를 봅니다.


병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사람을 피하게 됐어요.

재치료를 시작하면서 의도치는 않았지만 배우자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지내게 되면서,

무심코, 이게 나인가,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게 됐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것들에 내가 보였습니다.

굉장히, 다르게.


나를 싫어하지라도 말자고 인식하면서부터 그대로 보려고 노력했어요.

감정은 계속 꽤 죽어지내고 있으니 그대로 보려는 내 노력에 방해가 되진 않았어요.

그와 별개로 한 가지 깨달은 건 인간의 오감과 감정은 얼마나 자의적으로 '해석'되었었는가, 였습니다.


한 번 나에게 밉게 보였다거나, 한 번 나쁘다고 들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안 좋은 건가... 하고 생각했던 것들. 타인과 비교하거나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면서 점점 더 싫은 감정이 쌓여서 더 큰 싫음을, 그게 축적되면 혐오까지도 만들어내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읽는 걸 좋아해요.

특히 어떤 이야기 속의 인물들의 여정을 함께하며 울고 웃는 걸 좋아합니다. 지금 무릎에 앉아있는 가방에도 얇은 책 한 권이 들어있습니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시간이 늘 부족했던 저는 5분만이라도 틈이 생기면 책을 읽으려 늘 한 권씩은 늘 들고 다녔는데 그때마다 문학도처럼 보일만한 어려운 책만 들고 다녔습니다. 취향인 것들은 따로 있었지만 이를 숨기고 그때 그때 문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어려운 시집이나 소설책을 가방에 넣고 이런 책을 읽는 사람으로 봐주길 바라면서. 나도, 타인도, 세상도.


제가 가장 좋아했던 건 현실성이 전혀 없는 라이트 노벨이나 판타지, 순정 만화나 동화 같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들이었어요. 서투른 10대들의 첫사랑 얘기 같은 조그맣고 예쁜 이야기들이요. 깊이 있게 시대의 문제를 다루거나 예술을 추구하는 순수문학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런 제 취향을 세상사람들은 너무 가볍다고 핀잔을 줬어요.


그나마 청소년 권장도서로 불리거나 교과서에 실릴만한 작품이라면 한 사람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 가는 갈등이 없는 소설들이거나 한 사람의 관점으로 뭔가를 알아가는 논픽션이었어요. 절대적으로 서술자의 마음과 관점이 중요한 그런 것들이요. 그래서 혹시라도 진짜 취향을 읽혀 비웃음 당할까 한 장 읽는 날이 태반이어도 어려운 책만 들고 다녔던 것 같아요. 타인들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한심해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고 다녔었어요. 어려운 책을 어렵게 느끼면서도 나 이거 읽을 수 있어. 나 문학전공이야. 이 정도는 읽어야지, 하면서요. 사서 몇 번이고 통독을 하거나, 빌렸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부분발췌로만 읽고 반납했던 책들까지도.


그 과거를 뚫고 과거들이 뚜벅뚜벅 나에게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벽 한쪽 전체에 가득한 책장,

한 권도 들어갈 틈 없이 빽빽이 꽂혀있는 책들

물어뜯어 피딱지 가득 엉망인 열 손가락

화장대 한 켠에 좋아하는 향수

방안 곳곳에 키티인형, 키티 열쇠고리, 키티 포스트잇...


좋고 싫은 것들,

좋지만 타인에게 비웃음 당할까 들키지 않기 위해 내 공간에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 있는 것들과,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시선을 의식해, 좋아하는 척했던 것들. 그 수많은 것들이 섞여 이 공간을 행성처럼 떠돌고 있었습니다.


읽으려고 책상에 올려 둔 책 마저

<오늘은 잘 모르겠어>라는 제목을 가진 시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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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나는 나의 정체성을 쌓아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야 나의 정체성은 자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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