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감정과 사유의 "가격"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인간들에 얽어져 어디로든 흘러가겠지

by 는개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료
萬壽山(만수산)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하리
우리도 이갓치 얼거져 百年(백년)ᄭᆞ지 누리리라
이방원 <하여가(何如歌)>



고려 말기, 일백 번을 고쳐 죽고 죽어도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하는 말로 고려만이 나의 님이다, 라며 충성심의 방향을 틀려고 하지 않는 정몽주를 설득하려 지은 시라고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포은 정몽주가 얼마나 고려에 충직한 신하였는지를 증빙하는 시. 정몽주를 죽일까 말까를 가늠하는 이방원의 물음정도로만 알려져만 있는데 이방원의 이 단형시조도 굉장히 아름다운 작품이다. 있는 이 시가 떠올랐다.


지금의 창작의 마음을 시로 형상화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뮤즈, 영감- 여러 개로 불리고 있는, 인간이 하는 모든 창조적인 생각의 마음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인간들에 얽어져 어디로든 흘러가겠지.


몇 년 전, 저작권을 소재로 단편드라마 대본을 쓴 적이 있다.

제목은 <당신의 소유가 맞습니까>였다.

관람 목표를 달성하면 다음 작품을 계약하겠다는 제작사의 말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가 파멸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인공지능을 통해 전 세계의 영상작품을 대상으로 가장 인기가 높았던 구성과 장면들을 갖다 붙여 스토리 보드를 만들고, 그 장면 그대로 글을 써내어 목표를 이뤘지만 결국엔 파멸하는.


주인공의 목표와 감정을 따라가며 대본을 쓰면서 몇 개월을 저작권에 대해 생각했었다.

내 주인공은 한 컷, 한 씬, 한 시퀀스, 전체 구성(플롯)까지.

인공지능을 통해 전 세계에서 인기 있었던 모든 장면을 재조립하는 방법을 택했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 파멸했다. 거기까지였다. 작품은 완성했지만, 나는 얼마의 가격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직업이 작가면서도 창작에 대한 고뇌 없이 옳지 않지만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이 너무 컸기에 비극을 맞이했다


시집을 보면서, 소설을 읽으면서, 그림을 살피면서, 굿즈들을 구경하면서.

그나마 값이 매겨져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 사람이 만든 거구나, 하고 보는 대가를 지불한다. 시집, 소설, 그림, 굿즈. 캐릭터. 나 역시 재화를 지불하고 구입했다.


하지만 내가 쓰고 있는 드라마는 아니었다.

상연을 목적으로 한 극의 한 부분으로서 배우나 연출이 어떻게 붙느냐에 따라서 창작의 가치가 달라질 수 있었다.


드라마 대본에도 값이 없진 않다.

대한민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드라마 대본은 70분 분량 기준, 16부작 영상물로 만들어지는 드라마 대본을 책으로 퍼내면 두 권정도로 묶인다.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의 대본집이 나왔다. 16부작 드라마가 두꺼운 하드커버를 쓰고 두 권이 되어 있었다. (그 마저도 그 작가의 모든 작품 중 하나일 뿐, 전 작품이 존재하지도 않고, 소비자가 책으로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극 장르의 모든 작품이 상연을 전제로 하고 있으나 문학적으로는 희곡 자체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의무교육 과정에서 배우는 아주 당연한 개념인데 새삼 떠올리고 봤더니 상연된 대본에는 가격이 없다. 리딩을 하는 배우들이 한 부, 한 부씩 제본된 '책 대본'을 들고 대사를 외우는 걸 수 없이 봤지만, 그 어디에도 가격은 적혀있지 않았다. 내가 쓴 대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전에는 출판된 대본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드라마 대본이나 시나리오가 소비자가 살 수 있는 책의 형태로 나온 적은 있으나, 출간되는 기준이 모호했고 그마저도 희귀함에 가까웠다. 사실 일부 드라마의 팬을 위한 굿즈에 가까워 소량만 찍어냈기에 언제나 시중에 출판되는 책들보다는 값이 높았다. 결국 중쇄가 없을 것을 계산한 이익이 더해져 있는 셈이었으므로 작품 자체만의 가격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내 대본은 얼마일까.

값을 매길 수 없는 의미보다 상품으로써의 값을 알고 싶었다.

나라는 인간의 창의성이 만들어 낸 이 저작물은, 얼마일까 하고.


그래도 이전에는 손에 만질 수 있게 존재했다. 원고지로, 이전에 소설을 쓸 때는 256mg 디스켓으로, 정식으로 전공하고 나서부터는 A4 용지를 스템플러를 박은 것으로. 그리고 USB로. 예전에 습작물이 적었을 때는 완성한 작품을 따로 뽑아 하나씩 하나씩 투명 파일로 끼워서 끼워두기도 했다. 내 작품도 만져보고 싶어서. 그거야 말로 결과물인 것 같아서.


하지만, 상업적 산물로서의 가치는 없다.

하지만 그건 내 실력이 부족해서이지, 이야기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은 아니다.


3학년 때의 한 강의에서 자신의 작품을 출간한다면 얼마를 받을 것인지 리포트로 제출하라는 과제를 받았다. 오랫동안 답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단편집으로 출간하되, 얼마얼마라고 적었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 리포트를 내긴 했지만, 그저 기존 작가들의 단편집 가격을 참고한 시장가에 불가했다. 그 무렵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음에도 그 작품의 가격은 얼마인지에 대해 답하지 못했다. 결국 한 편당 가격, 한 세계관이 담긴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가격은 측정하진 못한 셈이다.


일단 쓰고 있던 드라마의 가격을 측정해 보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떤 가격으로도 적을 수가 없었다.

어떤 가격이든 쓸 수 있게 백지수표를 만들었다가, 백지수표가 쓰일 수 있을 만큼일까, 싶어 치워 버렸다가. 값을 매길 수가 없어서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환', '냥', '전'까지 썼다. 하다 하다 이제는 없어진 돈으로 도피해 버리는구나. 왜? 상평통보(조선시대 19대 왕인 숙종이 만든 최초의 동전)에 명도전(춘추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제가 공식 화폐로 법제화했던 화폐)까지 가보시지? 나 자신을 비꼬았다. 어떻게든 써보려고 썼던걸 지우고, 쓰고 다시 지우기를 반복했는데, 종이가 닳아 구멍이 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최초로 질문을 받은 지 십몇 년 만에 쓰게 되었다.

그 당시 다니고 있던 드라마 작법을 배우던 수업시간에 합평을 하고(그러니까 엄청나게 깨지고) 여의도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몰래몰래 눈물을 훔치며 가격을 적었다.

심사숙고한 가격도 아니고 홧김이었다.


'싯가'


결국은 가격으로부터 또 도망쳐 나 스스로 정하지는 못하고 시장 상황에 미뤄버린 것이다.











창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저작물을 세상에 내놓을 준비를 하며 끝없이 고뇌한다.

고전으로 후세에 남지 않고 사라진 책이라도 깊이를 잴 수 없을 만큼의 사유와 고뇌가 담겨있다. 얼마 안 되는 사람만 읽은 (사실은 남지 못하고 사라진 대부분의) 그 책의 최다 독자는 그 글을 쓴 창작자, 자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서 쓰레기라는 평가를 받았대도 한 글자 한 글자 필사 하는 것보다 느리게, 그리고 오랫동안 단어 하나, 구절 하나, 문장 하나, 문단 하나를 곱씹고 곱씹어서 응결된 고로쇠수액을 받듯이 받아 낸 것이다.


단순한 반응까지를 포함한 1차원적인 '생각'이 아닌

생각을 생각하고 생각한 한 사람의 '사유'의 묶음.


그게 창작물이다. 그게 미술인지 음악인지 분야에 따라 형태는 달라도 형상화되어 있지 않는 관념인 감정을 형상화하는 본질은 같다.


그중 나는 언어화되어있지 않은 감정을 언어로 만드는 데에 시간을 소비한 셈이다.

내가 언제부터 무엇을, 얼마나 썼는지, 내가 그것들을 써내기 위해 투자한 수많은 시간이 얼만큼인지 셀 수 조차 없다. 아니 투자가 아니라 소비다. 그럼 거기에 들인 모든 시간은 어떻게 금액으로 측정해야 하는가. 법정 최저시급으로 계산해도 환산이 안 되는 그 많은 시간은 형체도, 모양도 없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여러 형태의 저장 공간이 생겼다. 분실할 경우를 대비해 노트북에 있는 내 습작 물들을 주기적으로 외장하드에 두었다. 지금은 클라우드에까지 저장되어 있다. 습작물이 늘어가며 양이 많아지다 보니 여태까지 쓰고 남겨놓은 습작물들이 전부 있는 곳은 가상공간인 클라우드뿐이다. 존재하지만, 손에 쥘 수는 없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형체도 모양도 없는 쏟아부어진 시간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 모든 나의 습작물.

둘 중 어느 것에도 가격이 매겨지지가 않는다.


그러다 한 가수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새 앨범이 나오게 되어 홍보차 가진 인터뷰에서 소비자가 좋은지 안 좋은지 일부 곡을 들어보고 CD를 사면 안 되냐는 질문에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답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어보고 주문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사든 그 물건을 사용해 보고 값을 치르는 게 아니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만든 그 노래에게는 왜 들어보고 사겠다는 요구를 하는 거냐고. 그 노래는 내가 만든 내 것인데라고 답했다.


창작물은 개인의 생각과 사유와 감정의 응축물이다.

어떤 민족이기도, 어떤 인종이기도, 어떤 문화권에 속하기도, 어떤 시대에 속한 지, 어떤 국적인지도 모두 다른 시간과 공간을 가진 '단 한 사람'이 세상을 굽어보는 자신의 관점을 정제해서 만든 결과물이다.

'저작권'은 어떤 이의 '관점'과 사유를 시장에서 매매하는 행위에 필요한 권리이다.

책을 대표해 말하지만 음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한 가수의 인터뷰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은 모든 창작물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문득 깨달았다.

충분한 시장거래가 있어보지 않아 기준도, 가격도, 룰도, 경험도 없어 그런지도 모르겠다고.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로 가격은 시장이 정한다고 말했다. 고1 통합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상품의 가격이 정해진 과정과 거래하는 방법이나 수요와 공급에 따른 특징 같은 것을 배운다. 이걸 배우면서 고등학생들은 과거에 경험했었던 자신의 시장거래 (과자 한 봉지를 구입했다던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샀다던가 하는)를 하나의 지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저작물은 어떻게 거래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는 교과서는 없다.


시장은 오랫동안 오류와 수정을 거듭해 가면서 상품의 가격을 정해왔다. 단순히 산업사회에서 생긴 시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생겨난 이후로 모든 것은 거래되어 왔다.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에게 불을 팔았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물물교환으로 계속 이어졌다가 통화가 생기고 나서 대중화되었을 뿐, 작고 크게 시장은 있어왔다. 하물며 재산으로 취급되던 노비에게 손상을 입히면 그 주인에게 뭐뭐를 지불해야 한다는 고조선의 법조항도 있지 않은가.


기술이 발달해 이전까지는 없었던 공간에서 만질 수 없는 산물을 매매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 그것들은 거래되고 있다. 시대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지, 새로운 '시장'을 만든 것이 아니다. 가상공간으로 옮겨진 것일 뿐이다. 하지만 사유와 감정을 파는 건 다르다. 그 시장 자체가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값을 매기는 것도 설왕설래가 오고 가고 있는 중인데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속도가 너무 빠르다.


농업혁명에서 산업혁명으로 도래했을 때 보다, 산업혁명에서 정보화 혁명으로 넘어왔을 때 보다. 몇 배의 속도인지도 모르게 빠른데 하물며 한국은 오죽하랴. '시장'을 접하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시장'자체가 전부 형성된 것도 아니다. 날이 다르게 새로운 시장은 만들어지고 있고, 값을 매겨야 하는 저작의 범위도 정해지기에는 아직 멀었다. 우리는 형성되고 있는 중이라서 혼란을 겪고 있을 뿐이고, 앞으로 오랫동안 혼란을 겪을 것이다. 팔 물질이 분명한 산업사회에서 조차 몇 백 년간 몇 번의 수정을 거쳤다. 판매자의 결정으로만 가격이 형성되기도 하고 정부가 개입해서 가격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감정을 파는 시장은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모든 창작물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감정을 판다. 감정에 값을 매기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낯선데, 온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유래없는 압축성장을 해 온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물며 형체도 불분명하고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환산해야 할지도 협의해나가고 있는 중인 무형의 창의성이 만든 창작물이야 말해 무엇하겠나.


현재 세상에서 매매되는 창작물에는 규격이 존재한다. 하나의 '산물'로서 시장에서 매매하기 위해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만들고, 만들어 왔고,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더 디테일한 규격이 만들어질 차례다.


한 곡을 작사, 작곡, 편곡, 가창으로 나누어 재단한 것처럼.

개인이 스트리밍을 하는데 얼마, 상업적 용도로 사용할 경우 얼마, 하는 방식으로도. (물론 다른 방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저작의 기준은 세밀해지고 영역은 나누어져 마침내 적정하게 계산할 수 있는 가격이 형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필두로 거기에 맞춘 창작물이 또 만들어질 것이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한가.

감정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소비하며 함께 울고 웃으면서 살아가는 한 어떻게든 또 방법을 찾아갈 것이다. 누군가의 감정과 누군가의 이야기들은 또 누군가들에게 얽어져 어디로든 흘러갈 것이다. 이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거기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아는 이상 창작물은 존재할 것이다. 끊임없이 생성되고, 끊임없이 소비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시장이 과거에 그랬듯이 오류와 수정을 거듭해 가면서 발전해 갈 것이다. 스스로 가격을 정하고, 창작자의 저작권을 알고, 이것 역시 매매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저 어떻게 거래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이처럼 조금 헤매는 것일 뿐이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감정을 공감하고 사유를 소비하려 하는 한 어떻게든 또 길을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