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더 위해도 되는 합법적 자격

난 내가 좋지 않은데, 너는 나보다 나를 더 좋아하니 거기라도 기대 볼게

by 는개

나의 반려는 나와 정 반대의 성격의 사람입니다.

단 한 번도 다른 결괏값이 나온 적이 없는 극강 엔프피지만

적지 않은 시간 동안의 지속성 우울증으로 외향성이 눌린 상태의 ENFP인 나와

그런 나를 신기한 생물 보듯, 새로운 '종'을 바라보는 ISTJ.


세상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엔프피와 잇티제.

그와 내가 연애를 하게 된 건 너무 달라서였습니다.

서로를 알아가고 공부하고 학습해 가며 저는

이 사람의 옆자리가 가장 편안해졌어요.


처음엔 그저 신기했어요.

나를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도,

현상에 따른 내 반응을 신기해하면서도 잘못됐다 말하지 않는 사람도,

어느 선을 넘어서 친해지면 결국 버리고 떠나가지 않는 사람도.

그런 사람은 너무 오랜만이라.



결혼을 결심한 건 사실,

아주 즉흥적 결정이었습니다. 저는 비혼주의자였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을 내 수렁 속으로 데려오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끝은 보이지 않고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고

좋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가정환경에

이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결혼은

현실도피였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확하게는 이 울타리만을 위해서 살고싶지는 않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누군가를 위해도 되는 정당한

새로운 관계와 자격을 갖고 싶었어요.


배우자는 가족중에서

유일하게 좋아서 선택 할 수 있는 사람이죠.


좋아하지만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거나 (엄마)

좋아하지도 않고 선택도 하지 않은 사람이거나 (아빠)

좋아하지 말아야 하고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거나 (여동생)

좋아해도 소용이 없고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거나 (남동생)


그런 사람 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정말 내가 선택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다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서류안에 같이 있기로 했습니다.

잠시 안심하고 매달려있는 겁니다.

있던 울타리에서 온 힘을 다했으나 실패해

내게서 내 가치를 내가 찾지를 못하겠으니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서라도 살려고.


내가 필요 없는 나는

누군가가 필요로 하면 거기에 속해서.

존재의 변명을 하나라도 만들어 내고 싶어서.





정당한 자격이 갖고 싶었다




위해도 되는 정당한 위치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서류가 혼인신고서였어요.

처음 혼인신고서를 손에 쥐었을 때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었죠. 믿기지 않아서.


일기장에 숨겨놓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봤어요.

최소한 말없이 나를 버리고 가진 않을 테니까.


이혼하려면 최소 한 번은 어쩔 수 없이 만날 수밖에 없을 테니.


여태의 인연들에게 묻지 못해서,

말해주지 않아서 답답했던 마음을

그래서 상처받았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줄일 테니까


혹은

혹시 오늘만 몇 년째 살고 있는 내가 결국 살지 못하게 된다면

사망보험금이라도 남겨주면 그걸로라도....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욕먹을 말이지만 솔직히 그랬어요.









우울이와 함께 있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우울이가 잠깐 화장실에 갔는지 눈물이 소강하고 흐리멍덩하고 무겁던 머리가 맑게 개였습니다.

잠시 자리 비운 우울이가 확실히 없는 게 보이니 조금은 뭔가 안심이 됐어요.

여러 책들이 해보라는 대로 멋대로 생각해 봤습니다.


난 내가 좋지 않아서

딱히 필요도 없고

별로 '나'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지만.


나보다 더 나를 좋아하고,

나보다 나를 더 필요로 하는 것 같은 너에게

나를 잠깐 기대게 하겠다고.


'너'는 내가 좋다니,

나는 필요 없는 내 삶, 네가 좋을 대로 살으라고.


나는

좋은 학생도, 좋은 친구도, 좋은 선배도, 좋은 후배도, 좋은 알바도,

아니었고


좋은 딸도, 좋은 언니도, 좋은 누나도, 좋은 손녀도, 좋은 사촌도

아니었으며


좋은 사원도, 좋은 선임도, 좋은 후임도, 좋은 팀장도, 좋은 수석도

아니니.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를 쓰는 작가를 꿈꾸며

2,30대를 모두 바쳤지만

20년이 넘도록 아무것도 되지 못했으니.


그래서 이제야 온전히 우울해졌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희망을 남김없이 잃어서.


나는 뭘 해도 별 느낌 없이

아무 감정 없이 우울하기만 하니까

네가 원하는 내가 가치 있다면

그걸로라도 기뻐해 보겠다고.


너와 결혼하며 얻은 반려라는 자리,

나는 합법적 자격을 가지고 그것을 누리는 걸로 이유로 숨을 지속해볼테니












작가의 이전글개인의 감정과 사유의 "가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