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바다가 있어

첫 번째 단편

by 김능성

머리가 굳어가는 듯했다. 쉽게 답을 고를 수 없어 막막한 손길이 시험지 위를 방황했다. 시험지는 이미 3번이나 훑은 뒤였으나, OMR 마킹에는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6월 모의평가 날이었다. 온조는 이 날을 위해 정말 많은 것을 포기했다. 정확히는 약 5개월 뒤에 있을 수능을 위해서였지만, 이것도 수능의 일부인 건 마찬가지이니. 7년지기 친구의 생일파티, 온갖 유행어를 배출하는 인기 유튜브 채널의 새 영상, 시청률 23.4%를 기록하고 있는 드라마, 그리고 유명 가수의 콘서트를 포기했다. 그리고 사실,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온조는 많은 것을 포기해왔다. 초등학교 때는 방과후 학교 앞 분식집에서 먹는 떡볶이와 그 떡볶이에 곁들여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들을 포기했고, 중학교 때는 모든 아이를 대통합했던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학업 스트레스 해소를 핑계로 우정을 다지는 노래방 1시간, 그리고 정기고사가 끝나는 날마다 소파에 누워 즐기는 유튜브 알고리즘을 포기했다. 그것들은 어떻게 보면 정말 소박하다 못해 하찮았지만, 먼지들은 오랜 시간 동안 쌓여 아주 단단한 벽이 되었다. 온조는 평생 넘을 수 없을, 뚝 끊긴 빈칸의 벽이었다. 그러나 온조는 그 벽 너머를 볼 생각이 없었다. 남들 눈에는 안타깝게 여겨질 포기들 정도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온조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온조의 18년 인생에서 온조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단 한 가지, 수학이었다. 수학만 유난히 온조를 따라주지 않았다. 다른 과목은 전부 만점을 받을 만큼 뛰어나도 수학은 간신히 60점을 넘겼다. 운 좋으면 3등급을 받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4등급에 머물렀다. 다른 과목들이 압도적으로 잘났기에 한 과목쯤이야- 싶어도 온조에게는 수학이 간절했다. 온조는 꿈은 한의사였고, 수학을 못하면 한의대생이 될 수 없었다.


60분이 남았고, 12문제가 남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한 달 전보다야 발전한 수준이었다. 5월 모고 때는 50분이 남았을 때 12문제가 비어있었다. 그러나 문과생이 한의대생으로 거듭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코사인은 어쩌라는 건지, 이 등비수열은 어쩌라는 건지, 이해하기도 어려운 조건은 왜 3가지나 있고 이걸 어떻게 이용하라는 건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도 아직 수능은 아니니까- 싶다가도, 지난 6년 동안 바꾸지 못한 것을 6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설상가상으로 필적확인란에 들어있는 단어는, 하필 아침에 기숙사에서 반강제로 들은 노래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이미 한참 전부터 그 노래와 함께 문제를 풀고 있었다.


온조가 수학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진실을 모르는 남들이 볼 때엔, 온조를 수학에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큼 수학 공부만 해댔다. 온조도 남들이 좋다는 공부법은 전부 시도해보았다. 가장 최근에 정착한 방식은 문제유형을 하나하나 외우는 것이었는데, 보통 집요한 수준이 아니었다. 풀이과정은 물론이거니와, 문제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온조의 성적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비록 간당간당한 50점대에서 간당간당한 60점대로 성장했음에도, 아닌 건 아니었다. 그래도 미동도 없던 성적이 한 번에 10점이나 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짜릿했고, 온조는 그 이후로 성적 향상에 더 이상 진전이 없어도 문제 유형을 하나하나 외우는 방식을 고수했다. 사실 새로운 공부법을 시도해 보기에는 꽤 지치기도 했다. 아무리 거대한 나무이더라도 갈라지는 모양이 보이면 나무를 찍어내려볼 의욕이 생기는 법인데, 온조의 나무는 쉬지 않고 내리찍어도, 몇 년 째 도끼날이 나무기둥의 절반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열정으로 움직이던 몸이 지쳐 무너져가고 있었다. 온조는 그걸 '게으름'이라고 생각했고, '게을러진'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더 조금 자고, 더 조금 쉬기 시작했다.


온조는 간신히 9번과 10번을 풀어냈다. 그러나 여전히 10문제가 남아있었고, 남은 시간은 40분이 전부였다. 문득 눈앞이 아득해졌다. 짧게는 중간고사가 끝난 이후 한 달 동안, 조금 더 길게는 고1 겨울방학부터, 온조는 정말 수학만 공부했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했다. 차라리 공부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했다. 최선을 다해 부정해왔던 공부도 재능이라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었고, 온조는 수학에 영 재능이 없었다. 11번이었다. 그럼에도 온조는 풀이 두 줄을 쓰고 5분이 지나도록 발전할 기미가 없었다. 다시 시험지를 넘겨보았다. 그나마 만만한 문제를 찾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짓도 벌써 5번째였다. 결국 다시 돌아오는 장은 무려 25분 동안 머물렀던 그 장이었다. 그 장에서 승부를 보지 못하면 온조는 또다시 70점을 넘기지 못할 터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장의 문제는 무조건 다 풀어야만 했다.


온조는 문득 자신의 영혼과 수학 일타강사의 영혼이 딱 하루만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능날 그렇게 되어주기만 한다면 지금 이런 상황으로 인해 심각한 절망감을 느낄 일도 없는 것이다. 온조는 그렇게 영혼이 바뀔 수만 있다면, 자신이 어디까지 버릴 수 있을지에 관해 생각했다. 국어 1문제? 영어 2문제? 그 정도는 포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 끝에 남는 건 결국 심각한 자괴감뿐이었다. 눈앞이 너무 컴컴해서 이게 새하얀 건지, 새카만 건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눈에 띄게 가슴이 들썩일 만큼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리고 아직 그 한숨을 마무리하지 못했을 때, 대각선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온조를 힐끗 돌아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온조는 그 눈빛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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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는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발밑에 두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온조가 무언가를 하나씩 포기할 때마다 그 작은 발 아래에 둘 수 있는 아이들의 수는 늘어갔다. 그러다 온조는 비로소, 자신이 남들 위에 군림할 때 가장 큰 쾌락을 느낀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그것이 온조를 채찍질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한의대와 군림. 둘 중 무엇이 온조의 진짜 공부 동기이자 목적이냐 묻는다면, 온조는 군림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온조가 다른 아이들 위에 서서 그들을 휘둘렀던 것은 아니다. 그저 온조가 다른 아이들과 완전히 다른 종족으로 칭송받고, 그녀의 능력에 대한 칭찬을 받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모든 말에 집중해주고 따라주는 아이들의 호의적인 태도도 좋았다.


그녀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를 증오하는 사람도 없었다. 온조는 그렇게 가장 위에 머물렀다. 다른 아이들도 그녀가 그럴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오히려 그녀가 그래주길 바라는 듯했다.


모든 건 선생님의 실수로 온조의 같은 반 아이가 개인 상담 중에 온조의 수학 성적을 본 날부터 바뀌었다. 하필 진실을 알게 된 아이의 입은 너무나도 가벼웠고, 이후 아이들은 자신들이 온조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돌이켜보면, 온조는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성적을 밝힌 적이 없었다. 온조의 국어 내신 성적 꼬리표를 우연히 보고 다른 아이들에게 전달한 건 온조가 아니었다. 다만 수업시간에 성실히 임하는 온조의 태도나 유난히 그에게만큼은 친절한 선생님들의 태도는 온조의 위치를 오해하기 만들기에 적합했을 뿐이다. 온조는 그렇게 최상위로 끌어올려진 상태로 고등학교에 올라왔다. 온조는 그런 자신의 위치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지만, 굳이 부정하지도 않았다. 나쁠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조는 갈수록 불안함을 느꼈다. 자신의 국어 성적이 밝혀졌던 방식 그대로, 자신의 수학 성적도 밝혀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온조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온조를 최상위로 밀어넣었던 사건은, 온조를 최상위에서 끌어내린 사건과 아주 닮아 있었다. 아이들의 입은 어쩜 그렇게 가벼운지. 온조는 처음으로 남을 원망했다.


온조의 사정이 어떠하든, 그 거품을 만끽한 것은 온조였고, 마침 입시로 잔뜩 화가 오른 아이들에게는 물어뜯을 수 있는 무언가가 간절했다. 그러나 의외로, 지금껏 쌓아온 평판이나 대우가 한 번에 바뀌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온조는 공부를 잘하는, 쉽게 말 걸거나 하대할 수 없는 아이였고, 앞으로도 그런 아이여야만 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틀을 깨고 싶어하지 않았다.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변할 것이라 생각했던 온조는 혼란스러웠지만,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이 대우를 조금 즐기기로 했다.


그러나 방금 전, 그 아이가 온조에게 보인 표정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온조는 언젠가 자신이 다른 아이들에게 어정쩡하게 지어보인 웃음을 떠올리며, 저것 또한 그런 의도였을 거라고 애써 미화해 보았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 순간이 꼭 이 긴박한 시험시간이어야만 했나 싶었다. 방금 막 풀리기 시작한 11번의 풀이과정보다 그 아이의 표정이 더 짙게 시험지에 그려져서, 온조는 11번의 답을 찾아내자마자 샤프를 내려놓았다. 도저히 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온조는 지금껏 자신이 친구관계에 밍밍하다고 생각해왔으나, 사실 그 누구보다 남들을 열렬히 의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남은 시간은 32분. 온조는 처음으로 수학 시험 시간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시험지를 아무리 더 쳐다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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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온조'


온조의 OMR 용지에 박힌 석 자다. 이 때문에 온조는 반에서 1번이나 2번을 차지했고, 시험날마다 첫 번째, 가끔은 두 번째 줄 창가자리에 앉았다. 온조는 무려 6년 동안 창가자리에 앉아 온갖 풍경을 보았다. 이 때문에 온조의 시험 전 루틴은 창 밖 풍경 감상이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장난감처럼 움직이는 차와 사람들을 구경했는데, 너무 조그맣고 너무 올망졸망 움직이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 있자면, 자신도 정말 별 것 아닌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면 온조는 곧 '별 것도 아닌 존재가 잠깐 끄적이는 시험이 중요해봤자 얼마나 중요하겠냐-' 하며 스스로를 안심시킬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벌벌 떨리는 손은 여전했지만.


이번에 내다본 풍경은 지금껏 봐온 풍경과는 조금 달랐다. 사람보다는 풀이 눈에 들어왔다. 빽빽한 풀숲이 있었고, 도로 건너편에는 아파트 공사장이 있었다. 초록풀 사이사이에 노란 꽃이 잔뜩 피어있었다. 하늘은 파랗다기 보단 푸른 편이었고, 땅 위로는 노란색과 초록색이 적절히 뒤엉켜 그럭저럭 볼만한 풍경을 이루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창가자리에 앉아 창 밖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구나- 하다가, 마지막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아직 풀지 못한 9문제가 떠올라 책상에 고개를 푹 박았다. 한동안 시험지 냄새라도 맡는 것처럼 얼굴을 박고 있던 온조가 문득, 창가로 고개를 돌려 창 밖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에는, 어쩌면 신기할 것도 없었지만, 구름이 있었다. 처음에는 멈춰있는 줄 알았지만, 창틀에 걸린 구름의 모양이 계속해서 바뀌는 것이, 자신은 분명 흘러가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구름은 이래저래 신기한 모양이었다. 겹겹이 가득한 산봉우리 같기도 했고, 언젠가 이상한 국어 사설 모의고사의 비문학 지문에서 보았던 수관기피 현상의 나무들 같기도 했다. 그래도 가장 비슷한 건 파도였다. 구름이 파도 끝에 넘실거리는 거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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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는 바다를 사랑했다. 비록 그조차도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한번도 찾아가지 않아 흐릿해졌지만. 중학생 온조는 불편한 감정이 들면 바다에 가곤 했다. 수학 문제가 온조를 괴롭힐 때도, 죽을 만큼 공부가 하기 싫을 때도, 문득 방 안의 모든 종이를 찢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도, 온조는 하염없이 들이치는 파도만 바라보았다. 파도를 사랑하는 것. 그것만이 온조의 불편하고 불필요한 감정들을 씻어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 그리운 풍경이 하늘에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바다들이, 온종일 귀에서 철썩거리는 소리만 날 만큼 봐왔던 그 파도들이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돌아보면, 온조는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자신의 불편한 감정들을 씻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 가지의 불편함을 씻어내기도 전에 또다른 불편함이 그 위로 쌓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단단히 쌓아왔던 거대한 불편함의 모래성이, 하늘의 파도와 함께 천천히 씻겨 내려갔다.


온조는 하늘의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나에게는 9문제가 남았다. 푼 문제를 다 맞는다고 가정하더라도 64점이겠지.'

미동도 없던 몸이 움찔움찔하는 것이, 남은 문제를 마저 풀지 말지 고민하고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온조는 시험을 마치는 종이 칠 때까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눈 앞에서 넘실거리는 모든 파도의 거품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누워있었다. 온조는 파도의 마지막 거품이 창틀에 걸려 넘어갈 때까지 숨을 쉬는 등만 들썩이다, 마침내 모든 거품이 멎었을 때가 되어서야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 온조는 그냥, 주저앉아 보기로 했다.

그냥 지쳐보기로 했다.

입이 가벼운 아이들은 강온조도 사실 별 거 없었다, 늦바람이 났다, 결국 다 와서 무너졌다고 수군댈 것이다. 아까 보았던 그 아이의 웃음은 이제 익숙해질 것이다. 한의대는 남의 일이 될지도 모르며, 남들 위에 군림할 기회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온조는 그냥, 주저앉아 보기로 했다.


파도를 모두 떠나보내고 얼마 안 가 수학 시험이 끝났고, 온조는 자신의 시험 인생에서 가장 빈칸이 많은 OMR 용지를 제출했다.

멀어져 가는 OMR 용지를 바라보는 온조의 눈빛에는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대신 비어버린 책상에 다시 머리를 대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온조의 바다가 그곳에 있었다.

거품도 없이 넘실대는 바다의 한가운데에, 온조가 떠있었다.

그리고 온조는 어쩐지, 자신이 곧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온조는 분명, 바다를 딛고 일어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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