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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장비병은 사야 치료된다고

출국 4개월 전

by 뉴로그림


너무 빨리 연재를 시작했다. 준비된 게 없다. DS-2019가 5달째 안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뭔가 진행되는 건 없이 못 갈 이유들만 쌓인다. 같이 일하는 사람의 내시경 결과가 안 좋아서, 남은 사람이 힘들까 봐, 우리가 잠시 사라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주변이 난리다. 별일 없을 것이 분명한데. 나 하나 없어져도 이 세상은 잘만 돌아갈 것인데. 더 이상 말리지 마시라. 우리는 떠난다. 떠나야 한다. 떠나게 해 달라.


해외에 가면 걱정되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당장 생각나는 것은 네 가지 정도.


1. 언어 장벽

모국어도 잘 못 듣는 사오정인데 하물며 잘 못하는 외국어로 생활하기가 얼마나 힘들지. 살면 살아지겠지만, 걱정이 된다. 그래서 시작했다. 스픽. 말하기 어플이란다. 과감하게 1년 치 결제. 매일 한 강의씩 쉬운 강의부터 영어 초짜인 척 시작했다. 나름 재미가 있네? 계속하다 보니 챌린지 등급이 자꾸 올라간다. 그랬더니, 게임 중독처럼 더 높은 등급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호오. 매주 등급이 올라가더니 결국 최종 보스 등급까지 미션 클리어. 100일 매일 했다고 티셔츠까지 보내주었다. 와, 나란 사람 정말 성실하군? 뿌듯함도 잠시, 이후로 등급을 유지하는 건 재미가 없어 방치하게 되더라는 후기.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중.


2. 아플 때

대한민국 의료만큼 접근성이 좋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아이가 열이라도 나면 그날 바로 전문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최근에도 아이가 독감에 걸려 열이 39도를 왔다 갔다 했는데, 당일 진료, 당일 진단, 당일 페라리플루 정맥주사까지 한 방에 해결이다. 여기는 그런 곳이지. 그런데 해외에 가면? 이거 안 되는 거잖아? 매일 속앓이 하면서 열이 왜 안 떨어지나, 노심초사하겠지. 아이들 비염이라도 악화되면? 항히스타민 처방받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한 날 둘 다 비염약을 두 통 사다 쟁여 놓아 집에 쌓인 세티리진이 알약 두 통에, 물약 네 통이라는 훈훈한 소식을 전한다. 아마 출국 직전에 또 어마어마한 약들을 쟁여서 가게 되겠지. 차후에 준비물 정리하면서 관련 글을 남겨 보겠다.


3. 식재료

관세도 올린다 하고 달러도 들쭉날쭉하고 불안정한 시기인데, 외식비는 엄두도 못 낼 것 같고, 집에서 해먹을 식재료 공수에도 차질을 빚지 않을까. 한인 마트 등의 가격도 치솟게 되면, 한국에서 기본적인 양념장 같은 것은 다 이삿짐으로 부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정도다. 이 또한 차후에 이삿짐 정리하면서 관련 글을 남기게 될 것 같기는 하지만, 내심 걱정이 되는 부분. 아마 월마트나 코스트코에서 식재료를 사다가 미국식을 겸하여 뭔가 해 먹게 될 것 같긴 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가겠지 뭐.


4. 한국어 책 읽기

해외 가면 책은 어쩌지? 싶은 걱정이 마구 들었다. 나 아날로그 인간인데? 논문도 다 출력해서 읽고 그랬는데? 아이패드 프로 있어도 이북 한 번을 안 사본 나인데? 전자책은 에세이 같이 쉬이 읽히는 종류로만 몇 권 봤는데 쉬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해외라면, 쉽게 종이책을 구할 수 없다면, 선호도를 떠나서 전자책을 결국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사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이북 리더기. 가볍고, 눈이 피로하지 않으면서도, 무겁고 부피 큰 실물 책이 없이도 손쉽게 읽을 수 있는 도구.


아아, 그 와중에 주로 이용하는 알라딘(플래티넘 등급)에서 크레마 A를 출시했다고 할인 쿠폰을 주는 것이 아닌가? 어맛, 이건 꼭 사야 해! 오오, 오디오북으로 들을 수도 있고, 좋다. 가볍고, 손에 잘 감기고 해외 가서도 책을 많이 읽어와야지. 암.


그런데 알고 보니 "마음만 먹으면" 기존 아이패드로도 오디오북 다 되고 전자책 서점 어플 다 이용할 수 있고 TTS 기능도 좋고 뭐 굳이 몇 십만 원짜리 리더기 없이도 잘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오래 보면서 남는 잔상이나 눈의 피로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굳이 리더기를 하나 더 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인 게 분명한데.


이게 사람 마음이 간사하여, 눈독 들인 게 있으면 꼭 사야지 직성이 풀리고, 호기심이 해결되고, 사야만 할 것 같은 그 장비병이 치료될 것만 같고 막 그렇다. 이성은 '에이, 굳이 잘 볼 거 같지도 않고 이내 시들해지고 말 텐데, 왜 굳이 사, 그냥 1년 동안 아이패드로 보면 되지.' 하는데 내 마음이, 자꾸 리더기끼리 스펙을 비교하고, 왠지 있으면 더 좋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고, 자꾸 궁금하고 찾아보고 막 그런단 말이지.


원래 구매욕이라는 것은 애초에 이성의 역할이 아니었음을.


결국 이성이 이길지 감성이 이길지는 살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다른 걱정들은 다 어떻게든 되겠지로 끝났는데, 장비병은 사야 낫는다. 과연 이 병은 치료가 될 것인가!


25년 9월 30일 수정)

결국 이북리더기는 샀다. 한국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만 미국에 와서 정말 유용하게 사용 중이다. 사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가볍고, 배터리가 오래가는 데다가 읽기에 눈에 부담이 없다. 아이들 패드도 모두 가져와서 국회 도서관 등을 연동해 두었더니 오다가다 한국 책 보기에 좋았다. 영어 책도 미국 내 도서관과 연동해 두면 읽을 수 있는 게 많은데 영어 책은 사실 직접 빌려 보는 게 가장 좋다. 책은 진짜 필요한 문제집 몇 권과 좋아하는 책 각자 두어 권만 가져왔는데 책은 여러모로 무게도 나가고 해서 그게 낫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사서 읽고 싶으면 아마존에서 사서 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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