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c2으로 본 관심의 소중함
관심에는 에너지가 든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에서 뇌신경계와 각종 감각기관에서 소모되는 실제 에너지가 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물질을 만든다.
E/c2=m 이기 때문이다.
C가 매우 크기 때문에 에너지에 비해 아주 작은 질량이지만 실제 질량을 만들 수 있다. 100kcal의 에너지가 소모되었으면 원자 몇천 개는 만들어질 것이다. (정확한 계산은 이과에 맡기고...)
우리가 관심을 둔 것에 그 원자량만큼 질량이 더해진다. 그렇게 현실 세계에 질량을 추가할 것이라면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쪽에 관심(=에너지)을 주는 편이 낫다. 그러면 내 주변에 긍정적인 것이 생성된다.
에너지가 실체를 만들어내는 경우는 다양하다. 개인적 측면에서도 실체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는데, 지금껏 존재해 온 요기들이나 전설의 연금술사, 각종 기사들을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경우가 환청 및 환시다. 한쪽으로 치우쳐진 에너지는 환자에게는 명확히 존재하는 실체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대중에게는 보고 들리지 않더라도 환자에게는 명확히 존재하는 감각이다. 때문에 정신과 전문의도 그러한 환각에 대해 환자에게만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라고 배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환각의 존재를 부정하도록 가르치려 하지 않고 약물을 통해 억제한다.
또한 단체적인 측면에서는 우리나라의 80년대 잘 살아보자는 사회 구호가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고, 신도들의 진실된 믿음이 신을 실재토록 하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그럼 부정적인 것은 질량을 추가하지 않기 위해 애써 외면해야 하나? 자리를 떠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모종의 이유로 떠남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대부분 어떠한 중요성 때문인 경우가 많긴 하다.)
그러면 그때 발생하는 감정을 탐색한다. 그 감정이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니까. 그러한 감정을 느껴야 그 반대 감정도 느낄 수 있으니까.
이런 예로 나는 최근 믿음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 하지만 언젠가 이러한 경험을 신뢰를 주고받는 경험으로 보상받을 것을 알기에 사람을 탓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때 느낀 당혹감, 화남, 불신의 감정은 온전히 느끼면서 말이다.
우리가 먹고 마신 물질들의 소중한 에너지는 생각하고 보고 듣는데 쓰인다. 그런 에너지는 계속 현실에 자그마한 질량 덩어리들을 만드는 중이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보다는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것 보고 듣고 생각하는데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