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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an 18. 2018

6-1 <빌리 엘리어트> 뒷담화

* <느빌>의 오프라인 모임을 기록합니다. 느빌사람들의 열띤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겠습니다.

* 발제문과 녹취록은 전담 에디터 없이 돌아가며 작성합니다.

*본 녹취록은 이전 게시글인 '발제문'을 읽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빌리 엘리어트> 발제문

주소 : https://brunch.co.kr/@neuvilbooks/50



<빌리 엘리어트> 녹취록


참여자 : 학곰, 박루저, 다희, 동석, 이주, 해정



1막 <발제문에 대해>


박루저 – 개인적으로 영화를 다루는 건 책에 비해 부담스러웠어요. 영화 비평?이랄까, 혹은 영화 해석의 기본적인 것들을 모른 채 내용이나 서사만 가지고 접근을 하게 되잖아요. 특히나 명작영화는 영화판에서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내가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이미 대처의 정책과 연관하여 고찰을 하는 것, 성공신화로 조명한 비평들은 수도 없이 많더라구요. 그래서 나름의 고민을 하다가 이 속의 남성사회와 그 주변인들을 주목하는 거였어요.


 주목하고 싶은 것은 빌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남성. 빌리를 지지하는 것은 非남성.  


파업이라는 것은 노동자들의 현실도 바꾸지만 그 덕분에 빌리가 발레를 접할 수 있었잖아요. (발레교습소가 파업사무실로 쓰여 발레와 복싱이 같은 공간을 사용했기 때문) 이것 말고도, 빌리가 발레 책을 훔치는 장면(파업자가 경찰에게 엉덩이를 내밀어서 시선을 끌어 빌리가 책을 훔친)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다른 성공서사와는 차별점이 있다면 빌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주변인들의 서사 또한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예를 들자면, 빌리는 성공하지만 파업은 실패하잖아요.  빌리와 파업이 엮이다가 빌리가 발레학교에 합격하는 순간 파업은 실패해요. 마지막엔, 빌리가 발레 연습을 하며 지위가 ‘높아’지는 동시에 아버지는 복장을 갖추고 탄광으로 ‘내려’가요. 그래서 엔딩 장면에서 아버지가 이미 다 큰 빌리를 보러갔을 때의 그 눈빛이 매우 서글펐습니다. 빌리는 성공했어도 이 사람들의 인생은 10년 전과 다를바가 없겠구나, 혹은 더 나빠졌을 거다,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완벽한 영화이지만, 이제는 다른 빌리가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이제는 성공신화 뒤편에 가려진, 희생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해요. 이런점에서 포스트 빌리가 필요한거죠. 



다희 – 조금 아쉬웠던 건 광산 파업의 배경이 궁금했는데 발제에서 언급되지 않은 점이예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첫 장면이 마가렛 대처가 나오는 뉴스가 뜨고, 그것을 욕하는 장면으로 시작해요. 직설적인 대사들도 나와서 '저X이 미쳤다' 같이 여성 지도자를 욕하는 모습들도 나타나거든요. 파업의 배경에는 그런 맥락도 있었을 텐데, 마가렛 대처의 어떤 정책 때문에 전국적 파업이 일어났는지 궁금했어요. 


역사적으로도 당시 광부 파업이 되게 영국에서 되게 중요하다고 들었거든요. 성소수자들도 이 시위에 동참하게 되면서 여러 의미가 있었다고 해요. 


학곰 - 발제에서 주변부서사에 대해 의견을 제시한 점이 좋았어요. 맥락이 정확히 맞진 않지만 우리나라 영화중에 <말아톤>이 있잖아요. 장애남성이 마라토너라는 신분상승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상의 범주 안으로 들어오려는 이야기에서, 주인공 뒤에 있는 후원자. 어머니와 주인공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하지만 이런 후원자 서사는 대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많고, 그러다보면 모성애로 빠지는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으면 너무 못난, 너무 잘난 한 명 때문에 그 옆에서 희생당하는 형제들의 이야기. 이정도로밖에 나올 수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요. 


동석 – 빌리가족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어요. 파업과 빌리. 아버지가 중간에 다시 탄광으로 가는 장면을 보면 <개인과 시스템>이라는 아젠다로 봤을 때에는 개인이 다른 개인을 위해 시스템을 버렸다, 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한발 더 나간다면 이 ‘동네’라는 시스템으로 본다면 국가에서는 광산을 폐쇄시키고, 더럼이라는 마을의 시스템은 파업을 지지하고 있는데 요 시스템안에 있는 개인인 빌리네 가족은 빌리 개인의 성공을 위해서 자신의 시스템을 버리고 더 큰 시스템(국가)를 따라간 것으로 볼 수 있지도 않을까요.



박루저 – 더럼이라는 사회가 엄청 딱딱하고 폐쇄적인 사회잖아요. 예컨대 형한테는 아예 애초에 다른 선택권이 없었고, 아빠도 마찬가지구요. 중간에 선생님이랑 나누는 대화에서 빌리가 ‘나는 발레 하던지 광부 하던지’ 이 선택밖에 없다고 나온단 말이에요. 그니까 이 사회에선 선택권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딱딱함이 파업 때문에 흔들리다 보니까 빌리한테 발레라는 선택권이 주어진거죠. 저는 그렇게 파악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파업을 버리는 것과 빌리의 발레를 지지하는 것이 똑같지 않거나 파업이 빌리와 붙어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다희 – 맞아요. 파업도 왜냐면 시스템이 강요하는 일에 대해 거부하는 일이라는 성격도 있으니까요.


동석 – 맥락적인걸로 보냐면 파업을 하는 거랑 빌리가 발레하는거랑은 비슷한 느낌이고.


이주 – 파업이 빌리를 반대하기 보다는 파업을 하는 주체인 남성성이 빌리를 반대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결국 그들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파업을 하는 상황 때문인 것 같아요. 빌리가 발레를 하지 않는다면 광부가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행복하지 않을텐데, 빌리가 발레를 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파업을 하며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저도 파업과 빌리가 이어져 있다고 봤어요.


다희 – 마지막 장면도 그렇게 슬프더라고요. 빌리가 무대 나가기 전에 목근육 푸는 장면, 아버지의 눈빛 같은 것이 정말 좋았어요. 어렸을 때 이 영화를 봤을때는 아버지를 무서운 이미지로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다시 보며 느낀 건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와 형이 빌리에 대한 사랑이 엄청 크다는 것이 많이 느껴져서 참 애틋하고 슬프기도 했어요. 


박루저 – 이게 최고의 대사인 것 같아요.  He fuck'in did it! 


다희 – 그 대사도 인상 깊어요. 빌리가 아빠는 런던에 왜 한 번도 안 가봤냐고 묻자 런던에는 광산이 없잖아, 라고 대답하던 장면.



박루저 – 어떤 분석을 보니 <빌리 엘리어트>가 노동자의 언어를 잘 다룬 영화라고 해요. 다른 연구 중에서는 노동자의 자식이 학자가 되기가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가, 노동자들의 언어는 매우 단순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이런 과정이 다시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데, 화이트칼라는 전화나 문서나 모두 논리구조가 잡힌 언어를 사용하니까. 그 자식들 또한 그렇게 클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구요. 영화보면서 매우 환기되는 부분이었습니다. 


다희 – 그리고 또 우리와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다른 것도 이해하면 좋을 것 같아요. 영국은 애초에 계급사회여서 성공에 걸림돌도 많고, 계급이동이 거의 불가능하고 들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본인의 위치에서 만족하고 머무는 존재들이 많다는 것도. 또, 발제에서도 이야기했듯 '파업'의 의미도 한국 사회에서의 쓰이는 것과 영국에서 쓰일 때의 의미가 틀릴 것 같아요. 이런 영국의 문화적 배경 때문에 당시 이 서사가 좀 더 주목받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2막 <천재여서 성공했다?>



다희 – 어떻게 보면 빌리의 서사는 개인의 천재성에 굉장히 많이 기대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해요. 빌리가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어떤 시련에도 불구하고 성공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빌리가 처한 여러 난관들을 해결해가는 데에는 어떤 구조적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개인의 천재성으로 해소해버리는 느낌도 있었어요. 예술적 재능에 대한 국가의 도움이라던가 이런 것들이 필요할 수 있는데, 영화에서는 예술적 재능이 빌리의 가족과 빌리에게 성공여부를 책임지게 만드는 거죠. 


물론 영화속 빌리는 성공하지만, 솔직히 지금도 예술을 한다는 건 굉장히 경제적으로 부담되는 일이고, 성공률도 떨어지는 일이잖아요. 어쩌면 아직도 사회적으로 '예술'을 개인의 천재성과 희생에 빚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요. 


이주 – 많은 천재들,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시스템 속에서 결국에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 현재에도 많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빌리 엘리어트>에서 할머니도 ‘내가 진짜 춤 잘췄었는데...’ 라고 얘기했구요. 빌리도 만약 무용가가 되지 못했다면 결국에 그냥 그런식으로 무용담으로써 '내가 예전에 발레를 좋아했었지'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예술과 시스템의 관계라고 생각해요. 


박루저 – 영화에서 나오는 ‘예술’의 종류가 무용이었다는 게 상징적이었어요. 무용이 완전히 몸으로 하는 거잖아요. 완전히 몸을 강조하는 예술인데 영화 전체적으로 보면 파업으로 사람들이 격렬하게 몸으로 싸우고, 빌리가 동네에서 무용하면서 벽에 부딪히고 하는 장면들이 상징적이면서도 직접적으로 다가왔어요. 노동자계급의 몸이랑 발레에서 쓰는 몸이랑 대비되는 것들이 좋았어요.


학곰 – 저는 개인적으로 선생님이 처음 빌리의 발을 만지며 ‘선 좋네’. 라고 하는 장면이 인상깊었어요. 천재를 바라보는 안목. 그 안목과 더불어서 그 안목을 그 천재성을 키워줄 수 있는 조력자라는 역할을 하는 선생님이 되게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리고 발레하면서 담배를 피는 게 너무 멋있었어요.



다희 – 선생님 해리포터에서 론 엄마 배역 연기한 배우에요!


박루저 – 헛 그랬나요? 몰랐네요 보면서는. 


학곰 – 저도 전혀 몰랐었어요. 여하튼 하던 말을 이어가면 한 명의 천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먼저, 가족 안에서 '천재'인 아이에게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하고(특히 돈이 많이 필요한 분야라면), 두번째로 천재성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더럼이라는 마을은 안목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전무한 도시잖아요. 그런점에서 선생님을 만난 게 빌리에게 큰 기회였어요. 


한편, 우린 가끔 이런말을 쉽게 하는 거 같아요. 


누구나 다 재능이 있잖아. 모두 잘하는 게 하나씩은 있어.


진짜로 그런가? 막상 생각해보면 재능이 예술 같은 특정한 분야가 아니라면 그것을 발현할 수 있도록 마련해주는 환경은 마련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빌리 엘리어트>라는 서사가 조금 뒤로 갈수록 약간 아쉬웠어요. '결국은 천재 밀어주기로 끝났다.' 라는 점.  제가 천재가 아닌 일반인이니까. 그리고 천재를 동경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좀 공허해지는 것이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빌리가 처한 상황에 감정몰입되는데 끝나는 장면에서는 ‘아! 결국 쟤는 성공했구나.’ 하고 씁쓸해 지는...


박루저 – 그때 가족이 더 눈에 들어와요. 아빠가 면접장에서 너무 담담하게 전폭적인지지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장면을 보면 그때부터 빌리 성공가도 뒤에 가려질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희생이 너무 진하게 암시되요.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빌리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저 빌리를 지켜보는 관객이 되어버렸죠.



3막 <소수자들, 그리고 취존>



다희 – 빌리와 마이클의 관계도 인상깊었어요. <아몬드>에서 곤이와 윤재의 관계와 비슷하죠.  서로를 선입견으로 판단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해주는 관계로 만난다는 것. 빌리가 마이클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여자옷 입고 립스틱 바르는 걸 소문낼 수도 있는데 한 번 웃어주고. 발레복 주고 마지막에 헤어질 땐 친구의 인사방식인 뽀뽀로 해주는 것들. 이런 것들이 타인의 방식을 존중해주는 거잖아요. 


마이클도 나중에 성인이 된 이후 빌리의 공연을 보러왔을 땐 아예 드랙퀸으로 하고 왔어요. 빌리가 마이클을 이해해줄 수 있었던건,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특이한 일(발레)을 하고 있는 발레라는 취미를 하는 사람이니까 그랬던 거죠. 다른 남자들과는 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를 해줄 수 있던 거라고 생각해요. <아몬드>에서도 자신의 결점을 아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결점을 포용해 줄 수 있었잖아요. 자신의 결점을 아는 사람이 타인의 결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이주 –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게이 친구가 등장하는 거에 관련해서 그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빌리도 발레라는 걸 포기하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주위에 복싱하는 친구들만 있었다면, '내가 뭔가 잘못된 건가? 복싱을 해야 하나?' 라고 생각하고 발레를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런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특이함, 다양함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래요. 저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결국 내 다양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학곰 – 취존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한다는 거는, 내가 상대의 취향을 들을만한 포용할만한 여지가 생긴다는 거예요. 

세련된 취향을 만들고, 나의 취향을 구축해 나가는 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의 것도 인정을 해줄 수 있는 거죠. 어떤 보편적인 틀이 있고, 그것에 맞춰가는 것이 아니라 취향은 특수한 쪽으로 확장된다고 생각해요. 보편의 늪에 빠지지 않게 향상 경계하는게 취향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동석 – 빌리한테 발레라는게 무대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자체가 발레처럼 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장면에서 마이클을 데리고 권투장을 가는 거고요. 그것도 더럼에 있는 남자애들은 권투를 하고있죠. 아버지도 이 글러브는 할아버지가 준거라고 하면서 암묵적으로 행사하는데, 발레와 권투가 대척점에 있는 것인데, 파업으로 인해서 한 공간에 있게 되죠. 그런 장소에서 빌리가 크리스마스에 마이클을 데려와 발레를 해요. 그때 딱 아빠가 발레하는 걸 보고 선생님에게 가서 발레를 시키라고 하는장면에서 느낀건, 복싱장이라는 장소가 연대로 묶이지 않았나. 가족에게도 인정을 받고, 뭔가 자기도 발레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 아닌가. 모든 게 합쳐지는 과정. 아빠랑도 소원한 관계가 풀리고, 빌리와 마이클이라는 특이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합쳐짐.(발레와 게이 특수성) 그런 것들이 이제 권투장 안에서 발레를 하면서 하나로 모아진 것 같아요.


다희 – 한편 크리스마스 날 장작이 없어서 엄마의 유품인 피아노를 부시는 장면도 인상 깊었어요. 현실과 예술의 괴리를 보여주는 것 같았죠. 엄마의 뭔가 음악이나 예술적 재능을 아들들이 받은 설정인 것 같은 느낌도 받았는데. 예술과 현실을 따로 보는 장치들이 여럿 보였어요. 두 경계가 선이 뚜렷해서 처음에 예술을 하려면 현실을 포기해야 하는 여러 장면들이 있잖아요. 


그러나 빌리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춤을 추고 화났을 때도 춤추죠. 빌리에게는 현실이 예술이고 그걸 복합적으로 할 수 있는 순수성을 가진 아이인 것 같아요. 어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예술을 하는건 현실에서 동떨어진 일로 보이지만요. 예술은 현실 문제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분야라는 오래된 인식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게 아닌가 싶었어요. 영화 속 어른들처럼요. 


이주 – 저도 지금 문득 다희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보니까, 사실 빌리가 바라는 건 뛰어난 무용가가 되는 것일수도 있지만 그냥 춤 추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이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현실속에서 춤을 추는 것을 막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 것 같아요.


동석 – 그게 첫 장면에 나오잖아요. 침대에서 뛰면서 나오는 노래 가사가.


박루저 – 24시간 춤을 추고 싶다는.



학곰 – 저번주에 독립서점에서 하는 작은 공연을 봤었는데, 그때 왔던 한 가수가 하는 말이 대강 이런 것이었어요. "자기는 저번주에 취직을 했다.  더 좋은 장비를 사고 싶어서. 더 좋은 음악을 하고 싶어서." 그런 얘기를 하면서 이런 말도 덧붙였지요. "자기 음악을 하면서 음악가들이 더 어떤 걱정 없이 다음앨범을 만드는 환경이 되면 좋겠다."라고요. 현실이랑 예술이랑 분리해서 보고 싶지 않아도 그것이 녹록지 않은걸 그 순간에 느꼈어요.


다희 – 한편으로 예술에 대해서 막연하게 ‘가난한 예술가’라는 이미지가 보편적인 것처럼, 예술을 다소 낭만의 영역으로 놓으면서 시스템이 유지가 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예술에는 정당하고 경제적인 대우가 필요한 데 말이죠. 예술이 사회에도 없으면 안되는 부분인데 예술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은 싫어하는 오래된 관념들이 여전히 이어지지 않나 생각해요. 문학에서도 현실적인 문제들에 막혀서 전업 작가가 되겠다 하는 이들이 매우 소수인 것도 그렇고요.


이렇게 돈으로 환산하는 것을 꺼리는 분야라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여성의 가사 노동과도 연결이 되는 것 같은데요. 가사노동도 그냥 개인 희생의 영역으로 넘기잖아요. 정당히 노동의 대가를 주어야 하는 분야일 수 있는데, 그냥 개인의 희생의 영역으로 남기는 거니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낭만, 희생의 영역으로 두고 원래 예술은 가난하고 힘든거야! 라는 생각들이 아직도 이어지는 것 같아요. 


학곰 – 예술가들의 공연준비, 앨범준비 또는 그림그리는 것도 그들에게는 다 노동이고 그것도 엄연히 자기 시간을 소비하는 건데 띵가띵가 노는 듯한 이미지가 박혀 있잖아요. 다음 책 <시대의 소음>에서 초반부에 그런 부분이 나와요. 주인공이 소련과 엮이면서 노동자들이 할당량 채워서 일하는 것만큼 너도 그만큼의 음악 작업량을 만들어서 내라고 하는. 저는 그게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그 얘기가 전부는 아닐 것 같아요. 그런 것도 한 포인트로 잡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이후 자유로운 이야기를 하며 발제를 끝났다. 

해정이 뒤늦게 도착해 커피를 한 잔 시켰다.(느빌 합류를 확정했다. 짝짝짝)

시간이 흐른 뒤, 북파크를 돌아보다 블루스퀘어를 나왔다. 비가 그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다음 주제는 '예술'. 책은 <시대의 소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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