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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an 18. 2018

6. 반쪽짜리 리얼리즘, <빌리 엘리어트>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대하여

*느빌의 책방에서는 "전쟁"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시스템-개인"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시스템-개인" 3부작 중 마지막 텍스트입니다. <첫숨>과 <아몬드>에 이어서 합니다.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꼭 뒤로 가기를!



0. 시스템과 개인 - <빌리 엘리어트>


그간 다뤄온 텍스트들을 '시스템-개인'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했을 때, 이 텍스트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통점이 있다. 첫 텍스트였던 <첫숨>에서는 외부인이었던 개인이 한 사회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 그려졌고, 다음 텍스트 <아몬드>에서는 사회 속에서 개인들이 서로에게 접속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그린 듯 하지만, 두 텍스트 모두 결국 사회라는 경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반대로, 사회를 벗어난 개인은?

통합되는 사회가 아닌, 분열되는 사회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사회에 균열을 가하는 한 개인의 서사이다. 흔히들 <빌리 엘리어트>를 사회 환경을 이겨낸 개인의 서사로 보지만, 실은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사회의 잔인하고 서글픈 부분을 감추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매우 흔하디 흔한 성공신화를 재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새로운 흔적들을 남겼다.





1. ‘반대 남성의 오버랩

 

빌리의 꿈은 많은 반대에 부딪히는데, 이 반대의 주체들은 가부장제의 남성들과 매우 겹쳐있다. 흔히 여성의 무용이라고 알려진 ‘발레’라는 빌리의 꿈에 대한 찬반을 놓고, 남성과 그렇지 않은 인물들의 입장은 이분법적으로 갈린다.


영화 속 남성들은 매우 강하게 빌리의 꿈을 가로막고 있다. “퍽킹 발레”라고 윽박지르는 형, “펀치백이나 치”라며 피아노를 닫는 복싱 코치, “낫 퍽킹 발레”라고 단호한 아버지까지. 소설 속 남성은 빌리와 발레를 결코 자연스럽게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가 이미 죽었다는 설정과 할머니가 치매 걸렸다는 설정은, 한편으로는 빌리 가정을 남성 세계로 견고하게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론 “엄마라면 하게 했을 텐데”라는 빌리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출구 없는 가부장제 속에서 빌리 꿈을 지지하는 주변인의 필요성을 계속해서 드러낸다.     

그 주변인이란 남성(젠더)이 아닌 인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빌리는 가정을 떠나 비-남성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발레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된다. 당연하게도 빌리의 꿈을 지지하는 이들은 모두 ‘여성’이거나, 혹은 ‘게이’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치매 걸린 할머니, 발레 선생님, 게이 친구, 동네의 여자아이까지. (빌리가 발레를 할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조건들 역시도 모두 여성들로부터 나온다. ‘어머니의 유품’과 ‘월킨슨 선생님의 편지’등과 같이.)


그리고 이 비-남성들은 모두 이 소설의 기본적인 배경이 되는 ‘파업’이라는 상황에서 슬쩍 벗어나 있다. 빌리의 발레를 비난하는 많은 남성들이 ‘노조’라는 공동체로 묶여 있다면, 윌킨슨 선생님은 밖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집에서는 당연한 듯 집안일을 담당하고, 할머니도 철저히 가정에 귀속되어 있으며, 게이친구와 동네 여자아이는 사회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 존재들이다. 남성의 세계와 여성의 세계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빌리는 그 경계에 서 있는 것인데, 빌리로 인해 그 경계는 점점 흐려지게 된다.




2. 파업이라는 균열발레라는 선택권


그러나 남성의 세계로 대변되는 '파업'은, 역설적으로 이 남성 사회 전반에 균열을 내기도 한다. 꽉 막힌 남성들이 매달리고 있는 파업은, ‘성’ 이전의 ‘계급’으로 남성들을 돌아보게 하며, 가부장 이전의 하층계급으로서의 남성을 강조한다. 아버지와 형이 강경한 파업을 하고 있는 노조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관객은 더 이상 이들을 마냥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아무런 선택권 없이 노동이 전부인 광부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불쌍해 보이며, 그들의 폭력적 사고방식과 단순한 언어는 노동자라는 위치에서 비롯되는 서글픈 삶의 흔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파업이라는 설정은 영화 속 가부장적인 남성 집단에게 조금의 면죄부를 줌과 동시에, 답답한 가부장제 사회 전반에 균열을 가한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빌리를 발레로 몰아간 것 역시도 파업이다. 빌리가 처음 발레를 접할 수 있었던 계기는 파업으로 인한 발레수업이었고, 파업하는 노동자의 등장은 빌리가 발레 책을 훔치는 걸 가능케 한다. (그 외에도 빌리와 발레가 겹쳐지는 장면의 배경에는 대부분 파업의 한 모습이 깔려있다.) 결국 파업으로 인해 균열이 난 그 조그마한 틈에서, 빌리와 발레가 만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파업은 절망적인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자, 동시에 빌리에게 발레라는 인생의 또 다른 선택권을 주는 기회이기도 하다. 결국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파업의 서사와 빌리가 성공해가는 발레의 서사는 긴밀하게 오버랩되는데,     


이렇게 오버랩되는 순간 이 영화의 리얼리즘은 갈 길을 잃고 만다.




3. "He fucking did it!" - "Strike's over"


폐쇄적이고 가난한 사회 속에서 빌리가 성공하기 위해선 당연하게도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리의 성공을 제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빌리-성공'의 비용으로 '파업-실패'를 지불하면서도, 동시에 그 실패의 흔적들은 지울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빌리 엘리어트>는 ‘미운오리새끼의 성공신화’라는 익숙한 프레임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빌리의 성공 뒤에 가려진 이면들은 삭제된 채, 빌리의 해피엔딩에만 시선을 주기 때문이다. 빌리의 로열발레단 합격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동료들에게 외치는 “He fucking did it!”과 이때 동료들이 빌리의 아버지에게 말하는 “Strike's over(파업이 끝났어)”라는 대사는, 그렇게 삭제시킬 수밖에 없는 이면의 흔적을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파업’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노동자들의 시도는, 빌리라는 한 명의 특수한 아이만을 겨우 성공의 세계에 밀어 넣은 채 실패로 끝난다. 그래서 빌리는 이후 대도시인 런던으로 ‘올라’ 가지만, 그 뒤에 남은 아버지와 형은 다시 변할 것 없는 더럼의 탄광으로 ‘내려’ 갈 수밖에 없다.


그 이후의 장면들 역시도 이 남아있는 주변인들에겐 시선을 주지는 않는다. 빌리가 입학 이후부터 유명한 발레리노로 성공하기까지, 그 사이에 희생하고 실패한 가족들의 모습은 살며시 사라지고, 이후 무대에 서는 빌리를 보러 가는 가족의 모습이 바로 이어진다.


이 보여줄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빌리를 발레와 연결시켰던 비-남성의 지지와 노동자의 파업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처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빌리와 같은 성공신화 따위 없다. 여전히 빌리의 마을은 남성 노동자로만 상징될 테고, 파업이라는 실낱같은 균열(혹은 희망) 역시도 이제는 더 이상 없다. 빌리 성공의 대가로 이미 모두 지불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리의 무대를 보러 온 아버지(노동자)와 마이클(게이)은, 이 순간 빌리의 성공을 멀리서 바라보는 관객으로 밖에 제시될 수 없다. 빌리의 성공과 그들의 실패는, 정확하게 주인공과 관객처럼 분리되어 있다.

겨우 흔적으로만, 혹은 관객으로 모습으로만 이들의 실패를 그리기에 <빌리 엘리어트>의 리얼리즘은 반쪽짜리 리얼리즘이다.  


영화 속 아부지와 형. 파업이라면 자연스레 '불법파업' '귀족노조' 등등이 따라오는 우리의 현실과 달리, 영화 속의 파업은 수많은 시민들에게 일상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4. 포스트 <빌리 엘리어트>


결국 <빌리 엘리어트>는 폐쇄적인 가부장제 마을에서 여성적인 귀족 스포츠인 발레선수를 키워내는, 가부장제를 벗어나는 서사처럼 보이지만 이 변화는 그 이면의 많은 희생들을 전제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이 희생을 감내하는 것은 노동자와 여성으로 압축된다.


우리에겐 이제 이 희생을 흔적으로 제시하는 반쪽짜리 리얼리즘이 아닌, 주인공의 서사로 드러내는 더 적나라하고 초라한 리얼리즘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빌리 엘리어트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한 명의 스포츠스타가 탄생하는 것은 가능한 사회일지라도, 노동자와 여성의 평등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빌리와 같은 성공신화가 조명되고 강조될수록, 그 뒤의 그림자 속에서 절망하는 이들의 서사는 점점 가려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이들의 서사가 막역한 ‘희생’으로 포장되고 가려져서는 안 될 일이다.


이들은 어떻게 재현되어야 하는가.

훨씬 초라할지라도, 포스트 <빌리 엘리어트>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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