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th of '33 journal <여행의 여백>
프라하 한 달 살기를 했다고 하면, 십중팔구 이어지는 말은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 혹은 숨은 명소에 관한 물음이다. 그리고 그 둘은 같은 말이다. 여행 막바지부터 수없이 들어온 질문이지만, 그때마다 나는 적잖이 난감해진다. 왜냐하면 스스로도 궁금하기 때문이다. 프라하에서 가장 좋았던 곳? 추천할 만한 명소? 어딜 말해야 하나, 머리가 하얘진다. 나는 프라하에 있는 동안 대체 뭘 한 걸까.
솔직히 말하면, 한 달 살기를 앞두고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워낙 계획 없이 돌아다니는 편이기도 하고 그전에 헬싱키와 폴란드 여행이 더 시급했다. 정말 현지에 살아보는 거라면 굳이 계획을 세워 뭣하리 싶은 게으른 생각도 있었다. 평소처럼 때마다 하고 싶은, 해야 할 것들을 하다 보면 하루하루 자연스레 채워지고 살아질 거라고. 그러나 예상과 달리 무계획한 삶은 평소보다 심적으로 더 고단했다. 정말 집에서 지내듯 마음을 가볍게만 먹기엔 프라하에는 해볼 것이 많았고 어느 한 구석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정된 시간 속에 지금을 즐기겠다고 여기는 순간 그것은 이미 자연스럽지 않았다. 프라하에서의 며칠이 지나자 진정한 한 달 살기란 정말 어려워도 그곳의 매력을 잠시 덮어두는 일이라 여겨졌다. 가령 바닷가에 사는 이는 그 푸른 바다로 매일 나서지 않듯.
낭만을 찾자면 서유럽엔 파리, 남부는 피렌체, 동유럽은 단연 프라하를 꼽는다. 반짝임으로 무장한 이곳에서 나는 오로지 휴식을 꿈꿨다. 비울 때가 된 일상의 버거움이 쌓였고, 오랜 매듭을 풀고 난 후 절반의 해방과 허무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필요한 것은 빛나는 야경, 북적이는 축제보다 그저 비일상적인 일상의 편안함이었다. 그렇기에 어릴 적 보석함에서 꺼내 보던 장난감 반지처럼 작은 것들로 그 시간을 채우고자 했다.
일상에 가깝지만 정작 집에선 귀찮음이 발목을 붙들어 하지 못한 것들. 이를테면 가벼운 아침 조깅, 공원 벤치에 널브러지기, 집을 장식할 꽃 한 다발 사기,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걷기, 눈에 띄는 아무 데나 들어가 식사하기, 나만 알고 싶은 단골 카페 만들기, 원 없이 젤라또 사 먹기, 빈티지 숍에서 보물찾기, 현지인들만 가는 빵집 찾기, 골목골목 돌아다니며 사진 찍기, 멍하니 사람 구경하기...... 모아 놓으니 달그락달그락 거리는 예쁜 목걸이 같다. 일상에선 여백일 것들이 이번 프라하에선 주제이고, 이 글은 앞으로의 여행기가 한없이 소소하고 소소할 것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다. 물론 큼지막한 덩어리의 남은 에피소드가 없지 않지만, 프라하는, 여행은 단지 여백만으로도 충분히 빛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기도 하다.
모든 길엔 같이 걸을 이가 없을 때라도 마음먹기에 달린 반짝임이 있다. 하지만 이 여정은 내게 함께하는 행복을 가르쳤기에, 무엇보다 계속 읽어주는 당신이 있다면 좋을 것. 이제 이어질 프라하, 여행보단 '여백'이라 부르고 싶은 날들, 함께할 온기가 있었으면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