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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r 07. 2023

김희선 월드를 여는 한 권의 열쇠

'빛과 영원의 시계방', 김희선, 동아시아 서포터즈 서평

<빛과 영원의 시계방>, 김희선, 허블(2023).

탁월한 이론서나 교양서들은 상당수 글의 머릿말이나 첫 챕터에서 앞으로 다루게 될 내용과 책의 구조를 전반적으로 설명하고, 다음 장부터 구체적인 내용과 예시를 덧붙여가며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순서를 건너뛰며 내키는대로 읽어도 되는 소설집과 달리, 이런 이론서는 반드시 처음부터 읽어야 그 진가를 발휘한다.


김희선의 소설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죽음과 시공간을 초월한 현대의 마법서"라는 카피라이트 문구처럼, 일반적인 소설집보다는 마법서라는 이론서에 가까운 듯하다. 발표 지면도 시기도 다른 여덟 개의 소설들은 마치 한 권의 책으로 엮이는 날만 기다려온 것처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첫번째 수록작 <공간 서점>은 《빛과 영원의 시계방》이라는 마법서를, 그리고 김희선 작가의 독특한 세계를 여는 머릿말 역할을 한다.


과거 시계방 '천금당'이 있던 자리에 헌책방 '공간 서점'이 들어선다. 의뢰인은 자신을 천금당 시계방 주인의 아들이라고 밝히며, 공간 서점의 지하 공간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한다. 오래 전에 실종된 아버지를 며칠 전에 마주쳤는데, 그게 천금당 지하의 비밀과 연관이 있을 거란 추측 때문이다. 의뢰인의 사연 속에 묘사되는 W시의 과거는 5월 광주의 풍경을 연상시키며, 의뢰인의 아버지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시간여행과 평행우주에 관한 이야기로 연결된다. <공간 서점>은 실제 있었던 사건에 정교한 상상력을 더하는 김희선의 매력과,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를 경유하여 이야기하는 김희선 특유의 방식을 소개하듯 선보인다.


<공간 서점>을 통해 열린 《빛과 영원의 시계방》에서는 김희선표 상상력과 액자식 구성, 그리고 시간 여행과 평행 우주, 분기점과 선택이라는 주제가 유기적으로 반복된다. 때로는 각각의 소설이 서로의 평행 우주인 것처럼 미묘하게 겹쳐지며 확장되기도 한다. <오리진>은 소설 속의 소설을 통해 바티칸을 배경으로 하는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다룬다. <달을 멈추다>는 삼국유사를 통해 마인드업로딩이라는 소재를 풀어내고, <꿈의 귀환>은 소련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꿈을 정신분석학과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통해 얽어낸다. <가깝게 우리는>은 급격하게 산업화가 이루어진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기계처럼 일하기를 요구받는 사람들이 정말 기계로 대체됐을 때 벌어지는 일을 날카로운 상상력과 흥미진진한 문장으로 파헤친다. 


김희선 작가만의 장점과 확고한 스타일이 돋보이는 이 책은 SF소설 중에서도 시간 여행과 평행 우주라는 소재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독자들에게, 그리고 김희선 작가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친절한 입문서이자 다채로운 참고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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