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캐딜락
불과 몇 년 전, GM의 럭셔리 브랜드 캐딜락은 2030년까지 모든 라인업을 순수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당시로서는 가장 공격적이고 급진적인 전동화 목표를 제시하며 시장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내연기관 시대의 종언’을 선포하며 전기차 시장의 리더가 되겠다고 공언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가 예상보다 주춤하고, 시장 환경이 급변하자, 캐딜락이 결국 ‘전기차 올인’ 전략을 사실상 포기하고 백기를 들었다.
현지 시각 15일, 캐딜락은 현재 판매 중인 내연기관 세단 CT4와 CT5를 2026년 말 단종하지만, 주력 모델인 CT5의 후속은 다시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내연기관(ICE) 차량으로 선보일 것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이는 전동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고객의 선택권과 시장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GM의 전략적 선회로, 글로벌 자동차 업계의 전동화 속도 조절이 본격화되었음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탄이다.
사진 출처 = 캐딜락
캐딜락 글로벌 부사장 존 로스(John Roth)가 딜러사에 보낸 서한에 따르면, 현재 캐딜락의 내연기관 세단 라인업을 책임지고 있는 CT4와 CT5는 2026년 모델을 마지막으로 생산이 중단된다. 엔트리급 컴팩트 세단인 CT4는 이번 단종을 끝으로 라인업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지만, 브랜드의 허리를 담당하는 주력 모델인 CT5의 명맥은 차세대 가솔린 엔진 모델로 계속 이어간다는 것이 이번 발표의 핵심이다.
존 로스 부사장은 “CT5의 유산은 차세대 내연기관 차량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밝히며, 캐딜락의 스포츠 세단 라인업이 전동화 시대에도 살아남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 이는 캐딜락이 여전히 내연기관 세단 시장에 상당한 수요가 존재하며, 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차세대 CT5는 현행 모델과 마찬가지로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랜싱 그랜드리버 조립공장에서 생산될 예정이다. 이 공장은 당초 GM의 전동화 전략에 따라 전기차 생산 기지로의 전환이 유력하게 검토되던 곳이었으나, 이번 결정을 통해 당분간 내연기관차 생산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계획이 변경되었음을 시사한다.
사진 출처 = 캐딜락
캐딜락이 이처럼 야심 찼던 ‘100% 전동화’ 계획을 수정한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는 예상보다 더디게 성장하는 전기차 시장의 수요 둔화, 즉 ‘캐즘(Chasm) 현상’이다. 2020년대 초반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전기차 판매량 증가율은 2024년 이후 눈에 띄게 둔화되었다. 여전히 높은 차량 가격, 부족한 공공 충전 인프라, 배터리 수명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각국 정부의 보조금 축소 등이 맞물리면서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는 소비자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연기관 라인업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시장 수요를 스스로 포기하는 위험한 도박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했다.
둘째는 미국 내 정치적, 정책적 불확실성의 증가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 가능성 등으로 인해, 이전 정부가 추진했던 강력한 전기차 보급 정책(IRA 보조금 등)과 환경 규제가 축소되거나 폐지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2030년까지 신차 판매의 절반을 전기차로 채우겠다는 목표를 폐기하고,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는 등 전동화 전환 속도를 늦추는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정책적 불확실성은 자동차 제조사들에게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기차 전환 투자를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이러한 ‘속도 조절’은 GM만의 움직임이 아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2030년까지 시장 여건이 허락하는 곳에서 100% 전동화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사실상 폐기하고 내연기관 생산을 병행하기로 했으며, 포드 역시 전기 픽업트럭의 생산 목표를 하향 조정하고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강화하는 등 대부분의 글로벌 제조사들이 전기차 ‘올인’ 전략에서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 캐딜락
캐딜락의 이번 결정은 전동화의 실패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리릭, 옵틱, 에스컬레이드 IQ 등 다양한 전기차 라인업을 꾸준히 확장하면서도, 여전히 가솔린 엔진의 강력한 성능과 익숙한 주행 감성을 원하는 고객들을 위해 선택의 폭을 넓혀주겠다는 보다 유연하고 현실적인 전략으로의 선회다. 존 로스 부사장이 강조했듯, 이는 “고객에게 선택의 럭셔리를 제공”하겠다는 새로운 방향성이다.
전기차 시대의 도래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지만, 그 전환의 속도와 방식은 시장과 소비자가 결정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사례다. ‘전기차 올인’이라는 경직된 선언 대신, ‘고객 중심’의 유연한 포트폴리오를 선택한 캐딜락의 전략적 유연성이 급변하는 자동차 시장에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는 전동화의 미래가 하나의 길이 아닌, 다양한 가능성이 공존하는 ‘멀티 패스웨이’가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