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나나
아침의 시작
아침 6시 30분, 알람이 울린다. 출근하는 날이면 침대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다, 잠을 더 자기로 한다. 7시 35분, 화장실을 다녀온 후 다시 침대에 눕는다. 핸드폰을 확인할까 고민하다가, 그저 빈둥거리기로 한다. 잠이 들고 눈을 뜨니 8시 45분. 이제는 배가 고파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있지만, 어머니가 미리 준비해 놓은 식사를 마지못해 먹는 척한다. 내 안의 덜 자란 나는 화가 나 있다. 내가 원하는 음식을 먹지 못해서다. 화가 난 나는 69세이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어머니는 94세다.
마음의 준비
혼자 예배를 보러 가는 것이 망설여진다. 남편 없이 가면 사람들의 질문이 쏟아질 것이고, 점심은 어떻게 먹어야 할지,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럽다. 갈까 말까.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샤워와 화장을 한다. 과연 이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실까? 내가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내 입장과 타인의 시선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아님을 알고 있다.
감나무 가로수길에서
20분을 걸으며 가을바람의 시원함을 느낀다. 가로수 감나무에는 주황색으로 무르익은 감들이 달려 있다. 감나무 쪽으로 걸을 때면 홍시가 떨어지는 사고를 당할까 두렵다. 떨어져 깨지지 않은 감은 지나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간식이다. 그들은 깨끗한 옷에 감을 살짝 문지르며 맛있게 한 입을 드신다. 나는 그 감을 먹지 않았는데도 달콤한 맛이 느껴진다. 감이 떨어진 길은 얼룩져 있고, 누군가의 신발에 밀려 검은 그림을 남긴다. 이는 청소하시는 분들의 몫이다.
남편과 함께 걷던 길을 혼자 가니 걸음이 빨라지고 교회는 멀어진 듯하다. 지난주 같이 걸으며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일주일 후 우리가 함께 걷지 못할 것을 상상 못 했다. 멀쩡하던 그가 ‘UNKNOWN FEVER’라는 진단을 받고 입원한 것이다. 지금은 열이 내렸지만 염증 수치가 올라 퇴원할 단계는 아니다. 그의 수척한 모습은 영락없는 환자다. 이렇게 늙어가는 것일까? 언젠가는 내가 혼자 걸어가거나, 남편 혼자 걸어가야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가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가을에 혼자 걷는 것은 싫다. 차라리 한여름의 뜨거운 날씨에 혼자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싶다. 그렇게 하면 덜 쓸쓸할 것 같다.
예배의 순간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예레미야 5장 1절)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한 사람이 있을까? 그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목사님 설교는 용기 있고 비판적이며 단호했다. 목사님이 그 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다니는 교회가 그 한 교회였으면 좋겠다. 우리는 뻔뻔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낯짝’에 대한 비유도 하신다. 그보다 더한 말을 하고 싶으신 듯하다. 낯짝이 두꺼운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 나는 낯짝이 두껍지 않아서 가면(Mask)을 쓰고 다닌다. 주여, 용서하소서.
어르신과의 식사
혼자 걷는 것이 쑥스러운 나는 교회 식당으로 가서 공짜 밥을 먹는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고 질문을 받을 것이 걱정되지만, 가면(Mask) 덕분에 용감해진다. 반찬 세 가지와 미역국, 많은 분들의 봉사로 만들어진 맛있는 음식을 테이블로 가져온다.
내 옆에 93세의 어르신이 앉아 계신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 자주 입원하시는 분이다. 만나면 언제나 사탕을 주시던 분이지만, 요즘은 기운이 없으신지 사탕을 주지 않는다. 누군가 음식을 가져다 드리자, 비닐봉지에서 틀니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는다. 틀니를 장착하고 밥과 미역국을 번갈아 드신다. 반찬은 어쩌다 한 번 멸치조림만 드신다. 나는 밥을 다 먹고 떠나지 못한다. 두 사람만 앉은자리에서 어르신만 두고 일어나지 못해 기다린다. 마음은 이미 밖에 나가 있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이 두렵다. 어느새 어르신이 밥과 국을 다 드시고 수저를 내려놓자, 나는 그의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간다. 휴지를 가져다 드리고 상을 닦고 인사도 없이 식당을 나온다. 어르신을 언제까지 뵐 수 있을까? 이 분은 예배에 진심인 분인 것 같다. 아니면 자신이 살아있음을 교인에게 말하고 싶은 걸까?
병문안의 시간
든든하게 점심을 먹은 나는 남편의 병문안을 간다. 과일과 커피를 앞에 두고, 딸과 손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30분이면 충분하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지자 각자 핸드폰을 본다. 나보고 집으로 가라고 하지만 체면 상 시간을 보내며 지체한다.
앞의 병실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는 병문안 온 가족들을 몰라보신다. 아니, 눈을 안 뜨시는 것 같다. 열린 문 사이로 그들의 울음 섞인 소리가 나를 울게 만든다. “할머니, 할머니, 눈 떠보세요” 하고 애타는 소리만 들린다. 눈은 못 뜨지만 모니터의 심장은 뛰고 있다.
옆 병실에서는 찬송가와 기도 소리가 들린다. 두 병실의 분위기는 치유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잘 가시라는 가족의 소망이 느껴진다. 침대 옆에서 환자의 손을 꼭 잡고 앉아 있는 덩치 큰 아들인지 손자의 모습이 아름답다. 나는 누워 계신 할아버지께 “복 받으셨네요. 살아 계실 때 잘 사셨나 봐요”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돌아오는 길
병원에서 저녁 식사가 나오기 전 남편에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온다. 아침을 먹으며 화났던 마음이 생각나서 어머니께 미안하다. 엄마가 좋아하는 고등어자반을 한 손 산다.
이렇게 하루가 흘러간다. 나를 들여다보고 주변을 느낄 수 있는 오늘이 있어서 감사하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며 내 안의 나와 함께하는 아티스트 데이트는 나를 깊이 있게 만들어 준다. 고독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