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이나비
“잠깐만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인솔자에게 양해를 구한다. 단체 여행을 가면 나의 시간과 공간이 기획자의 의도대로 묶여있다. 내가 즐겨하지 않는 것도 해야 하고, 먹고 싶지 않은 것도 먹어야 한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생각하며 튀지 않으려고 섞여왔는데 요즘은 시간이 아까울 때가 많다. 이제 내 목소리를 조금씩 낸다. 아티스트 데이트를 알게 된 후부터는 중간에 어떻게든 짬을 만들어본다. 가끔은 눈치를 주는 사람도 있다. 애써 무시한다. 단체 일정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무리에서 벗어나 나와의 데이트를 즐긴다.
지난번 중국 장가계를 갔을 때도 혼자 걸으며 주변을 가슴에 담았다. 여럿이 얘기 나누며 걸었다면 보지 못했을 나무도 보았다. 희생자들의 혼을 달래주는 나무였는데 그들의 넋을 기리며 마음을 전했다. 얼마 전 세부 갔을 때도 혼자 걸으며 잊을 수 없는 두 소녀를 만나기도 했다. 유명한 리조트 안에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 속에, 구걸을 하고 있는 아이들…. 나름의 방법을 터득해서 도움을 청한다. 거절할 수 없는 애처로움을 느꼈다.
아티스트 데이트 덕분이다. 처음에 저자가 ‘나’와 데이트를 하라고 했을 때 부담도 되고 어색해서 혼이 났다. 연습이 필요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혼자 식사도 해보고, 혼자 붐비는 카페에서 차도 마셔보고, 나와의 데이트를 즐겨본다. 얘기할 상대가 나밖에 없으니 이런저런 생각도 하게 되고, 과거도 돌아보고, 숙제 같은 일들도 순서를 정해 본다. 그러다가 밖으로 눈을 돌려본다. 자연이 조용히 손짓한다. 계절마다 그날의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자연을 관찰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은 어디 비할 수 없는 기쁨이다. 물론 여건이 되어 먼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꿈이긴 하지만 우리나라도 아니 우리 동네도 좋은 곳이 많다.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이렇게 즐기는 것도 기쁜 일이다.
나는 워낙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남편은 우스갯소리로 “또 수혈하러 가냐?”라고 한다. 인정해 주고 말리지 않으니 따라오지 않아도 감사하다. 나갈 때마다 “또 어디 가는데, 저번에 갔다 왔잖아?”라고 말하면 머리 아픈데 일절 간섭하지 않고 다녀오라 한다. 사실 우리 두 사람이 다르긴 아주 다르다. 걷는 것도 나는 맨발 걸을 곳을 찾고 그 사람은 맨발을 못 걷겠다 한다. 나는 산을 좋아하고 그는 바다를 좋아한다. 또 나는 클래식을 좋아하는데 그는 트로트를 좋아한다. 그러니 어찌 늘 옥신각신하지 않을 수 없다. 먹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다르다. 그래서 같이 놀면 누군가는 희생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요즘은 맘 편히 혼자 다닌다. 그러다 가끔 누군가 한쪽이 포기하고 같이할 때도 있다. 요즘은 혼자면 혼자라 감사하고 둘이면 또 둘이라 감사하다. 그전엔 늘 반대로 생각하고 부정적이었는데 이젠 반대로 다 긍정하며 살게 되었다. 그것이 아티스트 데이트의 힘이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나니 감사한 일이 또 있다.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면을 생각해 보는 힘을 길러본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만들어지기까지 또는 무슨 일이든 내 앞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로움으로 왔는지를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먼지처럼 작다. 많은 사람들이 애써 열정을 바치고 노력한 덕분에 이 아름다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 그들의 수고에 감사하는 것 그러다 보니 매사 고맙지 않은 일이 없다. 아침에 어김없이 해님이 떠오르는 것부터 일어나서 할 일이 있고 갈 곳이 있는 것도 감사하다.
아티스트 데이트가 사람 냄새나도록 나를 만들어주고 있다. 그래서 잘 나이 들어가고 싶다. 나도 사랑하면서 남도 이해 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