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책씻이] 정체된 일상은 폭력일 수 있다, <흰 티티새 이야기>
개똥지빠귀는 10월에 날아와 이듬해 4월 추운 곳으로 날아가는 겨울새다. 그 철새를 티티새라고도 한다. 티티새는 등이 흑갈색이고 배는 희다. 그러니까 태생적으로 하얀 깃털을 지닌 ‘흰 티티새’는 아주 드물다는 얘기다. 순전히 저자 알프레드 드 뮈세의 상상물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튀는 존재는 대개 일상에서 부정적인 차별 대우를 받기 쉽다. 남의 둥지에서 태어나 ‘미운 오리 새끼’가 된 백조가 아니어도 그렇다.
“특별한 티티새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영광스럽지만 고통스러운 일이다.”
<흰 티티새 이야기>의 첫 문장이다. 남다름의 가치 역설이 첫 일성인 셈이다. 저자 알프레드 드 뮈세가 우화 형식을 빌려 자전적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19세기 중엽 프랑스 4대 서정 시인으로 꼽히면서 평생 다양한 극 형태를 실험한 극작가의 튀는 삶이 흰 티티새의 목소리를 낳은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티티새일까. 다른 새의 울음소리를 잘 흉내 내는 생래의 재능이 있어 시인의 운명 소재로 삼은 걸까.
동서양의 일상에서 티티새는 흔한 존재다. 포도 품종 메를로(멜르merle란 티티새의 프랑스어에서 유래)에,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에,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티티새’에, 이건청의 시 ‘티티새들은 체 게바라를 모른다’에, 올리비에 메시앙이 작곡한 ‘플롯과 피아노를 위한 검은 티티새’에 등등 여러 분야에서 친근하고 평범한 존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흰 티티새는 희귀해서인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우화에서 ‘흰 티티새’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임을 부정 당한다. 튀는 흰색이 흉한 몰골이어서, 그리고 낯선 목소리여서다. 당시 19세기 유럽의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마땅한 내침일 수 있다. 그 뿌리 뽑힌 정체성 혼란 상태에서 흰 티티새는 세상을 헤매다가 자기가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리곤 전설의 새 ‘피닉스’처럼 신비롭고, 명성과 부를 거머쥔 괴짜에다 완벽한 작가가 되겠노라 결심한다.
그래서 된 천재 시인의 성공은 마초적 허장성세에 닿아 있다. “우리 시대의 큰 유행에 부합하는 주제”와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재미, 그리고 사실적인 묘사 등을 버무린 세태 영합은, 흰 티티새라 속이고 결혼한 아내에게 실망해 떠나는 귀결을 낳는다. 그러나 우화의 결말, 즉 뮈세의 관점은 비관적이지 않다. 실패의 내면적 아픔이 곧 시적 동력임을 “최상의 시인” “꾀꼬리”를 통해 역설한다. 남다름에 대한 찬가다.
그런 관점에서 19세기 중엽(1841~1842)에 게재된 <흰 티티새 이야기>는 21세기 지금 여기에서 다양성 사회 구축에 참고할 만하다.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로 흰 티티새를 일상에서 몰아낸 아버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내면화한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부지불식간에 고집할 때, 주장이 다른 상대 진영을 향해 거침없이 막말을 쏟아내는 요즘의 막된 풍경이 일상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어서다.
물론 <흰 티티새 이야기>는 이솝 우화만큼 재밌지도 쉽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먹물기를 머금은 인용들과 현학적 비유들이 많아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무리에서 발견된 흰 티티새 설정은 차별과 소외가 대개 일상에서 일어나고 진행됨을 일깨운다. 아울러 그것은 ‘나’를 고집하는 정체된 일상이, 길게 보면, 자타 누구에게든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흰 티티새도 있는 일상 풍경 만들기에 보수・진보 구분은 없어야 한다.
<흰 티티새 이야기>, 알프레드 드 뮈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9. (2019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