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울린 ‘어쩌면’ 서사

[김유경의 영화만평] 대배우 유해진이 각인시킨 <왕과 사는 남자>

by 김유경

한 유튜브 방송에 출연한 철학자가 말했다. 이 시대의 정서적 통합을 위해 봐야 한다고. 그는 평소 내가 경청하는 인물이었다. 당장 보러 갔다. 대낮이어서인지 관객 다수는 중년층 이상이었다. 단종(박지훈 분)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에 ‘제목이 왜 왕과 사는 남자일까?’ 자문하면서. 내 기억 속에는 이광수의 <단종애사> 속 대립 구도가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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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에 대해서도 몰랐기에 첫 화면 속 망가진 촌장 행태인 유해진(엄흥도 역)을 보고 의아했다. 관람 후 엄흥도를 중심에 둔 영상물임을 깨달았다. 단종에서 상왕을 거쳐 노산군으로, 다시 서민 이홍위로 강등되어 타의로 죽은 단종과 수양대군(세조)을 부각시킨 <단종애사>와는 달랐다. 세조 대신 한명회(유지태 분)를 배치했는데, 그 한명회스런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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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컥울컥하다 끝내 눈물 흘리고 영화관을 나서자마자 거리에서 스마트폰으로 엄흥도를 검색했다. 그는 단종의 주검을 수습하여 매장한 실존 인물이었다. 시신을 거두면 삼대가 멸할 거라던 서슬퍼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다"는 뚝심을 어쩌다 부렸는지에 대해 감독 장항준은 앵글을 맞춘 것이다.


밥상 앞에서.jpg


‘만약’의 가정법 서사가 아니라, 사실에 ‘어쩌면’을 얹어 각색한 서사인 셈이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무기력한 이미지로 닫혀 있던 단종에 대한 평가를 ‘왕’다울 수 있었던 성품의 소유자로 비튼 것이다. 인간 이홍위와 엄흥도의 변화상을 입체적으로 연출하면서. 두 번째로 대통령을 탄핵한 이 땅 시민들에게 헐벗은 촌민들의 바람을 헤아려 밥상을 비우는 왕스러움을 창조해 안기면서.


엄흥도를 놓아주는 단종.jpg


엄흥도만큼이나 궁금했던 게 그 후손들의 삶이었다. 엄흥도는 사후 현종, 숙종, 순조, 고종 등 네 명의 왕을 거치며 점증적으로 높은 처우를 받아 마침내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에 이르며 사육신보다 높은 충절로 인정받았다. 그 덕에 전국으로 튀었던 후손들의 삶은 현재 안정적이다. 노량진 사육신 묘소에 가묘가 추가되어 분쟁 중인 사육신 후손들과 대비된다.


암튼 나는 놀랐다. 200여 년 움츠려 있었을지언정 멸족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그의 후손들에게도 복호(復戶) 조치가 행해져 벼슬에 오르는 등 정치적 불이익이 해소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삶터가 어쩌다 드러났을 때에도, 현상금 등에 현혹되어 그들을 해하려는 인물들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니까. 불특정 무지렁이들조차 엄흥도가 행한 일에 대해 모르쇠로 동의한 셈이다. 사회 통합의 근간이 무엇인가를 가늠케 하는 지점이다.


대사 중에 나오는 ‘공평한 기회’ 부여는 그렇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다발로 행해져야 가능하다. 2024년 대통령 탄핵을 외쳤던 당시 다영역에서 다차원적으로 ‘응원봉’과 ‘난방버스’와 ‘선결제’, 그리고 ‘키세스 부대’ 등이 어우러졌던 자발적 물결처럼. 중고딩 때 암기 위주여서 싫어했던 국사 수업을 이래저래 뒤돌아보게 된다. 다채로운 재해석의 역량을 아예 잠재웠던.


한때의 역사적 해석이 다르게 재해석될 수 있다. 영상으로라도 그런 감칠맛을 제공한 장항준 감독에게,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내 눈물 꼭지를 확 틀어버린 유해진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유해진은 장항준 감독이 연출한 엄흥도를 ‘왕과 사는 남자’로 생생하게 각인시킨 대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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