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나비의 당찬 삶

[김유경의 책씻이] 허연 시집 『작약과 공터』, 문학과지성사, 2025

by 김유경

시집을 들추는 나날이다. 1년 안에 묶인 것 중심으로. 마른 빵처럼 퍼석해진 내 감성에 물뿌리개를 대듯. 자꾸만 갈라지는 목청을 추스르려 낭독하면서. 그러다 오늘 허연 시집 『작약과 공터』에 삘 꽂혔다. 굳이 명암을 따질 필요 없는 뭉긋한 시선이 객관적 풍경을 두른 주관적 먹먹함을 변주한다. 거시적 미시적 관점을 아우른 그 응시가 나를 건드린다. 시집 한 권에 새겨진 시인의 물기 어린 “공터”가 나를 끌어당긴다.


표제시 ‘작약과 공터’의 전문이다. “진저리가 날 만큼/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작약은 피었다 // 갈빗집 뒤편 숨은 공터 /죽은 참새 사체 옆 // 나는 / 살아서 작약을 본다 // 어떨 때 보면, 작약은 / 목매 자살한 여자이거나 /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 / 슬픈 태도 같다 // 아이의 허기만큼이나 빠르게 왔다 사라지는 계절 // 작약은 / 울먹거림 / 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 //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 / 작약에는 잔인 속의 고요가 있고 / 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 책임을 진다 // 공터 밖으로 전해지면 너무나 평범해져버리는 고요 때문에 // 작약과 나는 / 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놓았다 // 작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 슬프고 수줍어서 한층 더 작약이었다”


“공터”는 누구나 지닐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보이는 세계가 아니다. 사회적 관계를 총체적으로 깊이 가늠해야 보이는, 두드러지지 않아 외진 세계다. 그곳에 지금 존재하는 건 살아 있는 “나”와 “작약”이다. “반드시 벌어진” 일로 인해 울먹이는 “작약”의 “고요”를 “알아채는” “나”는, “여기” “공터”에서 “책임을 진다”고 다짐한다. 비록 ‘슬퍼서 숨을 때는 빗속에 숨는 거야’의 흥건함에 젖어, “눈물을 흘렸지만 / 다시 스텝을 밟는 것”(‘스텝’)으로 다짐을 이행한다.


스텝을 밟지만 작약은 자꾸 피어났다. “여섯 살 그날의 기도”(‘과거새’), “스텔라”와 스텔라 바보(‘과거새’, ‘스텔라’, ‘파도는 아이를 살려둔다’), “칫솔대로 깎은 성모상을 쥐여줬”던 “빗자루보다 더 말라버린” “구십 성상”의 아버지(‘판교’), “초등학생들의 하얀 목덜미”(‘무사하기’), “고라니 한 마리”(‘그날의 목격’), “기울어가는 머리들”(‘기울어가는 생(生)’)처럼. 그 “공터에선 / 당신의 아름다운 나라와 / 내 끔찍한 나라가 / 불온하게 빛나고 있었다”.(‘작약과 공터 2’)


개인적 슬픔과 사회적 약자가 너나들이하는 “작약”에 열중하는 “시는 비명”(‘너는 좋은 사람이었다’)을 넘어선 사랑이다. 그 탓에 “눈물이 말라서 기체가 되어버린” “스스로 타버린 나비”가 될지라도, “타버린 나비에게만 보였던 별이 있”(‘타버린 나비’)기에 그건 패배가 아니라 당찬 삶이다. 그래서 “공터”를 보아낸 총체적 시선이 선택한 “타버린 나비”는, 별의 죽음인 초신성을 닮아 누군가에겐 새로운 별로 태어날 수도 있다.


요즘 출간된 젊은이들의 시집은 내가 읽어내기 어렵다. 머리와 가슴이 동떨어진 건 아닐 텐데도, 그 둘이 잘 연계되지 않는 겉돎을 자주 느낀다. 허연 시집 ‘작약과 공터’가 반가운 이유다. 각박한 세상 같아도, 각자도생이 주류인 것 같아도, “작약”이 피어나는 “공터”에 눈길 주는 이들이, 그리고 기꺼이 “타버린 나비”로 헌신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음을 나는 안다. 시인 허윤은 시로써 그 일, ‘불나비의 당찬 삶’을 일군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AI시대를 뚫은 각자도생의 해피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