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영화만평] 텁텁한 블랙 코미디, <어쩔수가없다>
블랙 코미디의 숨은 그림
관람 전에는 띄어쓰기가 무시된 <어쩔수가없다>의 알맹이에 대해 ‘어쩔 수 없는 무엇이 있겠지’ 기대했다. 그런데, 관람 중간부터 이건 아니지 싶었다. “어쩔 수가 없다”고? 재취업 전망이 어두워서, 정든 집을 팔아야 할 위기라서, 가족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서 등의 이유로 걸림돌이 될 경쟁자를 아예 처리한다고? 갈등 종료도 블랙 유머다. 앞서 행한 두 짓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두 희생자가 “개죽음이 되지 않게 하려면”, 세 번째 짓도 완수해야 한다니!
영화의 시대 배경은 송영길의 『시대예보: 경량문명의 탄생』 출간과 맞물린다.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유만수(이병헌 분)가 행복한 일상 중에 돌연 해고 통보를 받은 후 억지스럽게 “문 제지”에 입성하니 AI시스템으로 구축된 생산 현장의 유일한 인간 직원이더라는 줄거리니까. 영화는 송 작가의 책에는 없는 ‘경량문명’의 그늘을 숨은 그림처럼 품고 있다. 유만수의 쟁투는 ‘경량문명’을 선도하는 “빠른 전환자”의 가치 전도에 해당하니까.
‘경량문명’의 경량은 무게가 아닌 혁신의 차원이다. AI시스템 사회에서는 기존의 가치 체계와 관계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설계할 수 없다. 덕후처럼 심화된 개인으로서 더 적은 자본력으로도 연결망을 더 넓히면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면서도 서로를 더 위하는 마음가짐으로 거듭나야 한다. 영화는 그것과 거리 먼 유만수의 가족애, 사랑, 경쟁 등을 아우르며 블랙 코미디의 문제적 웃픈 상황들을 연출하여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다가, 시나브로 식상함을 안긴다.
해피 엔딩의 여운
물론 일상 안팎의 역할 경계를 태연스레 넘나드는 만수를 제 옷처럼 입은 이병헌의 연기는 박수칠 만하다. 연극무대에 선 듯한 이아라(염혜란 분)의 양감 있는 열연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낯설게 튀는 듯했던 유만수의 아내 이미리(손예진 분)의 언행 또한 장면마다의 상황극에는 적절하다. 박찬욱 감독은 연극무대의 막을 바꾸는 듯한 연출로써 배우 이성민과 차승원, 그리고 박희순의 개성 또한 짧지만 굵직하게 잘 살려내고 있다.
그 흐름을 따르다가 짚어진 게 있다. “지금 전쟁 중”이라는 유만수에게 이미리는 만수의 범행을 눈치채고서도 통화하며 공범의 뜻을 내비친다. “당신이 무슨 안 좋은 일을 하면 나도 같이 하는 거야, 알았어?”라며. 그 뜻밖의 가족 이기주의의 중량(↔‘경량’)을 대하고 느닷없이 나는 “정신 차려, 이화영”을 법정에서 외쳤다는 이화영 부지사의 부인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미국의 주요 도시에 연방군을 투입하려는 트럼프마저 생각났다.
<어쩔수가없다>의 블랙코미디가 국내 안팎을 강타하는 각자도생의 현실과 막장 드라마성 자극을 환기한 탓이다. 편 가르기와 분열을 부추기느라 사실이나 진실을 왜곡해 전달하는 가짜 뉴스들과, 상대방을 덮어놓고 악마화하고 공격하는 극단적인 언행들이 판치는 지금-여기를 살다 보니 감상을 텁텁하게 하는 것이다.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은 <어쩔수가없다>의 해피 엔딩이 불순한 기운들에게 힘이 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