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영화만평] 절박한 드라이버의 평화,<F1 더 무비>
지난 4월에서 6월까지 나는 자발적으로 갇혀 있었다. 요양병원에 계시던 어머니가 새 옷을 갈아입으러 떠나셨기 때문이다. 49재를 치르고 나서도 물기가 마르지 않아 7월부터는 일부러 기지개를 켰다. 번잡한 곳으로의 외출을 감행해 별 기대 없이 <F1 더 무비> 관람석에 앉은 이유였다. 그랬는데…… 난 소니 헤이스(브래드 피트 분)를 응시하다 달싹이기 시작했고, 그가 돈보다 더 중히 여기는 고독한 인간 정신에 감전됐다.
F1은 ‘포뮬러1월드챔피언십’을 뜻하는 자동차 레이싱 대회다. 그랑프리 레이싱(Grand Prix Racing)이라고도 불린다. F1은 드라이버(개인)와 자동차를 만드는 컨스트럭터(팀) 부문으로 나눠 순위를 정하는 스포츠다. 개인 챔피언은 드라이버 한 명의 시즌 성적을 합산해 순위를 정하고, 컨스트럭터는 팀당 2명씩인 드라이버의 점수를 더해 우승팀을 가린다. 영화에서는 컨스트럭터 에이펙스의 드라이버 2명이 소니 헤이스와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 분)다.
영화의 관람 묘미는 크게 둘이다. 하나는 “치열한 0.1초 승부의 전율”을 안기는 레이싱의 긴박감과 속도감 만끽이다. 너무 자세해서 다소 거슬린 방송 캐스터의 해설에 귀 기울여야 하지만. 다른 하나는 헤이스 캐릭터가 풍기는 절박함과 따스함에 접속하는 것이다. 30년 전 참혹한 사고의 후유증을 들먹이며 고함치는 에이펙스 운영자 루벤(하비에를 바르뎀 분)에게 "도전하지 않으면 우승하지 못"한다고 헤이스는 대꾸한다. 죽음을 개의치 않는 절박함이다.
그건 피어스에게 응수한 “기회를 만들어야지 바라는 건 전략이 아니야.”와 상통한다. 헤이스에게 레이싱 경쟁과 우승에의 열망은 ‘한순간’의 평화를 보기 위해서다. F1 최초 여성 총괄 기술팀장 케이트(케리 콘돈 분)에게 멋쩍게 들려준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심장이 느리게 움직이고, 모든 게 다 보이고, 아무도 날 못 건드리는 그 순간을 기다려요. 그 순간에 난 날거든요.”,를 헤이스는 아부다비의 마지막 레이스에서 실현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긍정적 상징을 영화적으로 입증한 셈이다. 늘 카드를 몸에 지니고 다니며 습관적으로 하루를 점칠 만큼 헤이스에게 인생은 불확실성이다. 그렇기에 돈과 명예, 그리고 사랑이 등을 돌려도 그는 여전히 자기 인생의 주체적 드라이버다. 1990년대 기대주였다가 추락한 드라이버 헤이스를 달가워하지 않는 에이펙스에서 팀워크를 생성하며 피어스를 성숙시키고 마침내 우승하는 서사는 그러한 헤이스 캐릭터를 밝히는 과정이다.
나는 헤이스 캐릭터에서 데카르트가 《방법 서설》에서 서술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라틴어 명제를 떠올렸다. 삶과 죽음의 현상 앞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지만, 우승을 뒤로 하고 단순한 사막의 드라이버가 되는 헤르스의 여정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행보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은 아니어도 누구든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자동차 레이싱 드라이버가 아니어도 인간 누구든 자기 인생의 드라이버니까.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통 없이 가시는 모습에서 위로를 받으며 병실에서 함께 파안대소했던 최근 순간을 떠올렸다. 당신 이름은 오래전에 잊었어도 끝까지 내 이름만큼은 기억하셨던, 마지막 순간에 어렵사리 한 번 더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셨던 어머니를 기리며 힘을 얻을 것이다. 어머니도 헤이스처럼 평화로운 한순간에 헌 옷을 벗었으리라. 고독하나 따스한 두 드라이버가 오버랩되어 행복했던 외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