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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연한 속살끼리의 교감, 그 사랑

[김유경의 책씻이] 희랍어 시간(<한강> 수록 장편소설, 디 에센셜)

by 김유경

한강의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 1장은 보르헤스의 묘비명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로 시작된다. 첫 밤이자 마지막 밤을 보낸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놓인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라 여기는 “나”의 서술로써. 여기서 “나”는 희랍어 강사인 “남자”다.


그에게는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古지도 같”은 “왼쪽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 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가 있다. 보르헤스처럼 유전적으로 약체인 그의 눈에 실명을 앞당기는 과거 어긋난 사랑이 만든. 그런 그가 계단에 얼굴을 다시 부딪혀 안경이 깨져 어둠이 짙어진 날 희랍어 수강생 “여자”를 안고 입맞춘다.


마지막 0장의 “나”는 그 “여자”다. “여자의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여자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이 다른 장소로 옮겨져 있기를 바라는 듯이.”, 의 실어증을 앓던 2장의 그녀다. 반년 전 죽은 어머니를 기려 온통 검은색 차림인. 실어증 재발로 해오던 문학 관련 일을 다 접고, 이제는 양육권과 면접 교섭권마저 잃은.


그러던 그녀가 혀끝으로 입술을 축여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실어증에서 놓여난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놓인 칼, 즉 실명과 실어증을 제치고 틔운 사랑 때문에. 22장에 걸쳐 두 남녀의 가장 연한 속살일 고통으로 독자를 몰아넣은 서사의 이런 시적 낙관이라니!


고인이 된 독일인 벗이 그에게 지적한 말대로라면, 0 이하의 세계에는 이데아가 없는 마이너스의 어둠이어서 “어떻게든 플러스의 빛이 있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오롯이 그녀의 심해일 “숲”에 닿아 “정적”이 옮은 21장의 남자에게, 남자를 매개로 온몸과 화해해 말문이 터진 0장의 여자는, 열린 세상으로 이끄는 “플러스의 빛”이 된다.


비록 덧없는 물질세계지만, 그것과 자기 자신 사이에 빛이 있는 남자는 묘비명 속 보르헤스보다 행복한 존재다. 그 남자를 선보이느라 수고한 작가 한강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일상어는 현실 세계와 한통속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죽은 언어인 희랍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두 남녀의 행색과 동선이 지금 여기 타인지향의 주류와는 딴판인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일상을 꾸리기 힘든 장애를 지녔어도 두 남녀는 처지를 비관한 채 가만있지 않고 독립하여 일상에 뿌리내리는 자립적 태도를 이어간다. 그리고 두 닮은꼴은 연대하여 에워싼 어둠을 밝히는 빛을 일군다.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폭력적 언어가 일상어를 오염시키는 요즘, 저 어둠을 밝히려 의지를 다지는 응원봉들에서 두 남녀의 태도를 닮은 장삼이사를 본다.


응원봉 광장이 『희랍어 시간』이 아닐까.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 수 있는 언어”를 헌재에서 들으려 빛을 돋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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