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책씻이] 낯설지 않은데 낯선,<조금 망한 사랑>(김지연 소설)
대개 소설집들은 함께한 작품들에서 대표작을 선정해 표제로 삼는다. 김지연 소설집 <조금 망한 사랑>이 특이한 이유다. 엮인 아홉 작품에서 표제 같은 제목은 없어서다. 작품마다 풍기는 공통 뉘앙스를 따져 그렇게 정할 수는 있지만. 독자의 뇌피셜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이 소설집의 묘미가 바로 그 지점이다.
작품 발표 시기가 2022년에서 2024년까지니까 <조금 망한 사랑>은 최근 세태를 반영한다. 그렇다고 주된 등장인물들인 2030세대의 삶의 풍경들이 사회 전체를 대변하는 표집이라고 할 수는 없다. 거주, 취업, 사랑, 동거 등의 문제적 사안들이 대중 매체의 뉴스들을 통해 들어봤을 소재들이어서 낯설지 않을 뿐이다.
“민재와 헤어졌다는 사실 역시 미루고 미루다가 민재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다음에야 호두에게 알려줬는데, 그때 호두의 이야기를 듣고 민재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나는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 때문에 될 일도 안 될 것이다. 그로 인해 평범하게 사는 것을 감당해야 한다. 내가 상상한 평법한 삶이라는 게 웬만한 건 다 충족된 삶이었다는 것도 나중에 깨달았다. 집이 있고, 차가 있고, 일 년에 한두 번 해외여행을 가고, 함께 여행 갈 애인이나 친구나 가족이 있는, 그런 게 평범한 삶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런게 평범하던 시절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그건 아주 어렵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삶이었다. 민재가 말한 평범한 삶이란 불운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살면서 한두 개의 불운이란 없을 수가 없으니까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삶이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지. 그날 호두가 민재에게 끝없이 전화를 걸다가 연결되지 않자 끝내 울어버리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포기」, p.25)
“웬만한 건 다 충족된 삶”은 SNS 사진들에 많지만,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가 트렌드인 “평범한 삶이란 불운과 함께하는 삶”이다. 평범한 삶이란 용어는 낯설지 않은데 낯설게끔 읽게 하는 서사가 <조금 망한 사랑>을 관통하는 “조금 망한”을 가리킨다. 「포기」의 미선에게도, 「반려빚」의 “그저 0인 채로 오래 있고 싶”은 정현에게도, 애인 선경에게 화가 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숨기는 「정확한 비밀」의 대영에게도 온 ‘현타(현실 자각 타임)’ 같은.
실패나 어긋남일 그것이 그들의 전도양양함을 긁은 “조금 망한”에 불과한 건, 사건 당자자인 주인공들이 끝났다는 심정으로 주저앉지 않아서다. 그건 ‘빨리빨리’나 ‘영끌’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그렇다고 느긋함이나 초월함은 아닌, 목표 없는 어중간함이다. 속내를 숨기고 통념을 매뉴얼 삼아 연기하듯 사는 「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의 대영처럼, “지갑 속에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넣고 다니는”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처럼 제딴은 안전한 각자도생이다.
그건 관계의 그물에 걸렸음을 아는 데서 비롯한다. <조금 망한 사랑>에서는 이성애와 동성애가 자연스레 공존하지만, 관계 회복을 위해 애면글면하지 않지만, 주인공의 심사는 자기 인식에 갇힌 채 손익계산을 행하느라 수시로 불편하다. 그러느라 이 소설집에서 미성년자가 주인공인 두 작품, 「가능한 밝은 어둠」의 “밥은 벌어먹고 살까 걱정이야”처럼,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의 “달아”처럼, 말과 단어의 이중성이 충돌하는 속내를 삼키는 삶을 꾸린다.
그 서사들이 내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비록 지금은 망했지만, 그래서 미래가 불투명하기는 하지만, 섣부른 결론으로 남은 생의 여백을 채우려 하지 않는 그 어중간한 휴지기에 대해 공감한다. “다 늦게서야 무엇이 끝났고 무엇이 끝나지 않았는가를 생각”한 「긴 끝」의 문애에게 그랬듯이. 그건 다시 시작하려는 자기애가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나중에라도 타인을, 그리고 세상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