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길냥이의 숨바꼭질

[김유경의 오늘] 술래가 되다

by 김유경

내가 녀석을 처음 본 건 어제 밤 9시 무렵이다. 지하 서재 쪽 계단을 내려서다 흠칫하면서다. 뭔 뭉텅이가 꿈틀해서 냉큼 멈추는데 소름이 돋는다. ‘이게 뭐지?’ 계단 모서리에 있던 물체도 방어하듯 한층 움츠린다. 잠시 후 가르릉 소리를 내더니 야옹 한다. 고양인 거다. 몸피만큼 우는 소리에서도 애티가 난다. 절로 입에서 애고~ 소리가 나온다. 난 고양이가 왠지 꺼림칙하다.


가끔 길냥이가 마당에 들어온다. 화단 구석에서 잠자듯 쉬고 있거나 담 위에 앉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모른 체 시선을 거둔다. 그러다 한 번은 구린 냄새가 심해 살피니 방금 튀어나간 곳에 똥이 있다. 평소 말끔하길 바라는 나인지라 똥에 EM을 뿌리고 흙으로 덮어 쓰레기봉투에 넣는다. 이후부터 길냥이가 집에 들어오면 약하지만 ‘가~~’ 한다. 녀석은 세 번 정도 연속되는 내 행동을 빤히 바라보다 휙 가 버린다.


며칠 전 담 밖에서 애끓는 길냥이 소리가 계속 났다. ‘어디 아픈가?’ 나가서 집 주변을 살피니 옆집 공간 골목에 두 마리가 엎드려 마주보며 울고 있다. 유기견 보호센터를 떠올리고 동주민센터에 문의하니 구청 업무란다. 구청은 공공도로의 길냥이 사체는 치우지만(사유지 것은 제외), 산 길냥이는 법이 없어 구제할 수 없단다. 게다가 캣맘(Cat mom)들 항의 사례를 들려주며 민원 편에 설 수 없는 고충을 얘기한다.


두어 시간 지나 울음소리가 그쳐 나가 보니 사라지고 없다. 구청 직원 짐작대로 발정기여서 그랬나보다. 그러나 난 맘이 불편하다. 내 집을 드나드는 길냥이 수는 갈수록 늘어나고, 나는 선뜻 캣맘이 되지 못하니 그렇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지자체가 운영하는 동물보호센터는 없다. 동물보호법은 1991년에 제정돼 시행되고 있으면서도. 그런 참에 새끼 길냥이가 바로 눈앞에서 떨고 있다.


어쨌거나 당장 서재로 들어가야 해서 팔을 약하게 내저으니, 우왕좌왕하다 계단 위로 튀어나와 사라진다. 이후 녀석은 주기적으로 울음소리를 내며 담 안에서 밤을 넘기고 아침을 맞는다. 배도 고플 텐데, 어미가 찾아오길 기다리는가. 울음소리를 따라 뒤꼍으로 가니 골목 가운데 앉아 있다. 물과 햄을 준비해 향하니 도망가다 담을 뛰어넘지 못하고 궁지에 몰린다. 녀석의 두려움을 생각해 나는 후퇴한다.


이후 몇 차례 나는 술래가 되고 녀석은 숨바꼭질한다. 나중에 녀석은 정화조가 있는 어둔 공간을 은신처로 삼는다. 다른 길냥이가 들어올까 걱정돼 녀석의 먹을거리를 손에 들고 들락날락하다가 오후를 맞는다. 내 일상은 ‘어떡하나?’의 파동에 휩쓸려 있다. 그러는 중에 인터폰이 울린다. 나가 보니 가끔 동네에서 본 적 있는 할아버지다. 줄기찬 녀석의 울음소리를 듣고 오신 거다.


몇 분 후 할아버지는 플라스틱동이로 녀석을 잡아 준비한 자루에 넣는다. 그냥 두면 굶어 죽는다면서. “어디서 살게 하나.” 혼잣말하며 들고 가신다. 나는 비로소 안도한다. 그러나 저녁 내내 나는 불편하다. 울며 오도카니 앉아 있던 녀석의 모습이 자꾸 되살아난다. 그러면서 훨씬 약자인 녀석에게 역지사지해서 행동하지 않은 내가 점점 부각된다.


불현듯 제주도 예맨 난민 문제가 떠오른다. 그들의 인권과 낯선 문화권 사람들에 대한 우려가 내 속에서 충돌했던 걸 기억한다. 이미 240만 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땅에 살고 있고 더 늘어날 추세다. 공존해야 한다면, 이제라도 사회적 합의를 위한 공론화 과정을 밟아야 한다. 14일에 돌출한 ‘이란 난민 김민혁군(16) 아버지 ㄱ씨(53)의 난민 지위 인정 촉구’처럼 목소리 낸 경우만 구제해서도 안 되니까.


두 달 이상 ‘조국 정국’을 만들고 뒤흔든 이슈, ‘공정・평등・정의’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는 술래가 되고, 다른 누군가는 숨바꼭질하는 일을 방치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이 아쉽다. 그럴수록 삶에 충실한 집단지성 일구기가 절실하다. 아울러 솔선수범 없이 구호 남발에 그치는 정치 행태에 대해 진영을 막론하고 단호하게 등돌리는 시민의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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