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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Jun 22. 2021

살아 봐야 안다더니

[김유경의 오늘] 백내장 수술을 하고서


잠에서 깨어 눈 뜨기 전 심호흡한다. 크고 작은 점들이 공간에 둥둥 떠다녀도, 탁상시계 숫자가 거뭇하게만 보여도 심쿵하지 말자고. 부어서 시원스레 올라가지 않는 눈두덩으로 욕실에 들어서면 거울 속 내 얼굴이 희미한 윤곽으로 존재한다. 며칠 이어지니 내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따금 있는 투약 부작용으로 각막이 까여 그렇단다. 백내장 수술 후 선명한 거리 광고판들을 보며 환호한 게 며칠 전인데...   

  

습관대로 다이어리를 펼치니 내가 쓴 글씨들을 분별할 수 없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할 수 없는 삶이 내게 닥친 거다. 상상한 적이 없다. 시간 나면 보려고 꽂아 둔 서가 책들을 떠올리자 막막하다. 영화 <기생충>에서 무계획이 계획이라던 아버지 사기꾼의 대사가 떠오른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어서 살아 봐야 안다는 얘기다. 물론 위기 상황에서의 대처는 사람마다 다르다. 인생살이가 다양한 이유다.  

    

그때그때 감당하며 사는 인생을 난 ‘그냥 산다’라 여긴다. 여기서 ‘그냥’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세상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기는 쉽지 않다. 내가 지닌 선입관, 편견, 아집, 부덕(不德), 이해관계 등이 부지불식간에 작용해 사실과 달리 해석하거나 믿을 수 있으니까. 나를 수시로 돌아보는 한편, 각종 매체와 유튜브가 쏟아내는 정보 홍수 속에서 ‘그냥’거리 정보를 밝혀내는 법도 익혀야 하는 이유다.  

   

최근 G7 정상회의에 2년 연속 초대받은 문재인 대통령이 국익과 국격을 높이며 이룬 국제적 위상 강화 관련 뉴스들을 당시 포털에서 좀체 찾을 수 없는 판에 여론조사를 매주 실시해 발표하는 언론지형은 ‘그냥’ 뉴스 생산과 거리가 멀다. 지난 18일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 관련 대법원 배상 판결을 무시한 채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판결을 버젓하게 소신껏 행한 김양호 부장판사의 인식은 더더욱 그렇다.     


암튼 지금 시력 장애가 생긴 나는 어떻게 해야 ‘그냥’ 사는 걸까. 내 마음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기능하는 생체는 분명 ‘나’가 아니므로 더는 집착하지 말자. 대신 각막 회복에 약 2주 걸린다는, 20년 이상 내 눈을 진료한 전문가의 식견을 믿자. 아울러 안 보이는 눈으로 굳이 보려 애쓰지 말고 이참에 잠 보충으로 눈을 쉬게 하자. 갈수록 호소 수위를 높이는 엄마의 절망적 몸짓에 대해서는 한껏 귀 기울이면서.  

    

내 몸이 불편해지니까 엄마를 거칠게 하는 병세가 맘에 들어온다. 안쓰럽다거나 안타깝다거나 식의 거리 유지 분별력이 아니다. 얼굴에 달라붙은 미세한 무언가가 일으키는 이물감이 성가신데 보이지 않는 눈을 대신한 손이 포착하지 못할 때의 답답함을 안 후 돋은 동병상련 같은 거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런 저런 통증 때문에 성질부리는 엄마의 속내는 얼마나 어지러울까 헤아리는. 

   

살아 봐야 안다는 말이 비로소 와 닿는다. 돌아보니 내가 그토록 즐기던 책읽기는 지식을 줄지언정 지혜를 안기지는 못한다. 지혜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 순간을, 그 시간을 살아 봐야 접할 수 있는 앎이다. 그저 알아챌 뿐 누구와도 나눌 수는 없는. 그러니까 ‘그냥’은 지혜의 영역이다. 눈의 장애가 ‘그냥 살기’를 응시하도록 도운 셈이다. 현산 스님께서 내미신 손길처럼.  

   

눈은 안 보이는데 엄마 때문에 끌탕하는 나를 현산 스님 제안은 정신 차리게 한다. 언제든 SOS를 보내면 만사 제치고 달려오시겠다니! 피붙이도 마다할 고된 역할을 대신 맡아 내 숨통을 트이게 해줄 요량으로 KTX행으로 먼 길을 줄이시겠다니! 눈물이 솟는 중에 다시 맘먹는다. 늘 엄마 입장에서 헤아리자고. 시시비비를 따지기보다 잘 들으려는 마음을 내어 엄마의 불편함을 어루만지자고. 그게 그냥 사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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