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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Oct 31. 2021

발바닥 선생님

[김유경의 책씻이] <걷는 독서>(박노해, 느린걸음, 2021)

박노해는 안팎으로 계속 걷는다. 몸이 갇혀 머물러도 의식(마음)으로 다른 세계를 유랑하고, 거듭나며 살고자 오지를 찾아가 걷는다. 그 잇따른 걸음으로 빚은 책, ‘걷는 독서’에 난 두 번 놀란다. 너무 두툼해서 한 번, 책장 넘길 때마다 마주하는 세트 구성(사진&경구警句&영역英譯)에 한 번. 참 신선하다. 어서 넘기고 싶다.  


 

  

사람마다 나름의 경험치가 있다. ‘걷는 독서’는 박노해스런 “참된 독서”를 이루는 쉼표들의 합창이다. “자기 강화의 독서가 아닌/ 자기 소멸의 독서다.”를 퍼뜨리는. 점점 너른 세계로 몸소 섞여 들어가면서 익히는 세상살이(세상 읽기)에 자기가 받은 “그 사랑을 제 한 몸에 가두는” “사랑의 배신자”는 쓸데없다고 일깨우면서.    

  

그에게 “사랑은,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얼굴 없는 시인’에서 무기징역수를 거쳐 ‘나눔농부마을’ 설립자에 “이르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목적지다.”가 되게끔. 걸음마다 “인생의 결정적인 네 가지 인연./ 부모. 친구. 스승. 연인./ 그리고 그 모든 걸 결정짓는/ 진정한 나 자신.”을 투입하면서. 그 삶이 곧 “좋은 사회로 가는 길”이라 여기면서.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때라 그런지, 20년 이상 국경 너머 가난과 분쟁 지역에서 ‘걷는 독서’를 실천한 그의 부추김에 솔깃한다. “민주주의는 늘 시끄러운 것./ 살아있다면, 일어나 외쳐라.” 그 외침은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와 맞물린다. 그래야 “약한 자 힘주고/ 강한 자 바르게” 하는 정치를 탄생시키니까.  

   

내처 읽다가 내 깜냥이 옥에 티를 발견하고 멈칫한다. 한국어의 뉘앙스, 특히 시어詩語를 맛깔스레 옮기기는 어렵다. 그래도 “그윽한 여운 한 모금.”을 옮긴 “A sip of quiet seclusion.”에서 seclusion(은둔, 격리, 한거閑居 등)에 자꾸 걸린다. “그윽한”은 quiet 보다 secluded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암튼 “한 모금”과 짝 진 “여운”의 감칠맛이 안 난다.   

  

물론 이 또한 의미 있는 책읽기다. 국경 너머 지역에서 영어나 현지어를 쓸 박노해에게 말은 “낯선 길에서 기다려온/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중요 수단이다. 그러나 “나는 너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온몸을 기울여 느낄 수 있을 뿐.”이기에 “말은 삶으로 완성된다.” 발바닥으로 사랑을 선보이는 선생님이 되는 이유다.    

 

“사랑은 발바닥이다./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지만/ 내 두 발이 그리로 갈 때/ 머리도 마음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642~643쪽)  

  

“선생님이란 앞서 사는 님./ 먼저 진리를 살아내고/ 앞선 길을 걸어가는/ 선생님이 그리워라.”  (660~661쪽)  

  

‘걷는 독서’를 사는 박노해는 내게 발바닥 선생님이다. 발바닥은 예민하다. 미세한 알갱이도 감지할 만큼. 그래서 가는 길에 놓인 장애물과 쉽게 맞닥뜨릴 수 있고, 그러다 상처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어떤 악조건에서든 “긴 호흡/ 강한 걸음.”으로 어디든 내딛을 것이다. “오늘은 사랑 하나로 충분한 날.”이니까. 그가 또 피울 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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