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은 어디 가면 볼 수 있나요?

제주와 제대로 마주하다

by 유화


꽂이 좋아지면 나이가 드는 걸 인정해야 하는 시점이 온 것일까? 꽃, 꽃이라니. 꽃이 보고 싶다니. 두 달 만에 찾는 제주에서 3일을 머무는 동안 꼭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관광지나 맛있는 집 투어가 아니라 바로 수국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3월, 공항에 막 도착한 내게 시간이 늦었다며 발걸음을 재촉해 처음 와보는 숙소에 턱 하니 내려놓고는 장례식에 얼굴을 비추느라, 그다음 날은 오전부터 출근해 새로 들어간 회사에 충성하느라 덩그러니 혼자 두었던 그 일을 맘에 두고 내내 불편해하던 남편이었다. (사실 그 불편함을 잊지 않도록 부지런히 상기시킨 건 나였지만 말이다.)


숙소에 오독하니 홀로 남겨져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던 나는 부산히 몸을 움직였다. 직접 뽁뽁이로 포장을 해서 싸준 익숙한 그릇이며 살림은 플라스틱 박스 안에 보내주던 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고, 집을 구하는 동안 미처 하지 못한 빨래가 캐리어에 한 가득이었다. 어느 전기용품과 짝인지 모를 전선과 마구 풀러 댄 비닐들까지 한데 뒤엉켜 발 디딜 틈 없이 난장판이 된 그 좁은 집 거실에서 조용히 남편만을 기다리고 앉아있을 수만은, 정말이지 없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주변 한 바퀴를 돌았다. 방세 비용을 아끼기 위해 오래되고 낡은 집을 구한 것이 아니라 번화가에 방 두 개가 있는 오피스텔을 구한 터라 큰 마트도 병원도 있어 우선 안심이었다. (최소한 끼니를 못 때워 굶어 죽거나 아프다고 징징대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1차로 물건 정리에 기본 청소를 마치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입주청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새 집 냄새로 숨 쉬기가 곤란해 남편이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장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풀 옵션이었기에 집을 구해 준 지인도, 남편도 따로 구입할 게 하나도 없다며 새로 얻은 집을 좋아해 마지않았지만 욕실화하며 큼지막한 쓰레기통에 냄새를 빼줄 향초까지 내 눈엔 사야 할 것 천지였다. 다시 한 번 사 온 물건들을 쓰임새 있게 정리해 놓고는 냄새 빼기 작업에 들어갔다. 도착한 날 밤늦게까지 이어진 작업은 그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남편이 제주 가서 좋겠다, 이번에 가면 구경 실컷 하고 오겠네, 제주에 오기 전 내가 들은 말들은 다 부질없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고생만 할 바엔 당분간 제주에 오는 일도, 당신을 보러 오는 일도 없을 거라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니 유독 나에게만은 모질지 못한 남편이 무언가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들긴 들었을 터였다.


"수국? 꽃 말이지? 그래. 축제 알아볼게."

"아니, 축제 같은 거 말고 골목에, 사람들 없는데 그냥 예쁘게 핀 수국이 있는, 그런 데 가고 싶어"


남편이 제주에 오고 나서 가장 달라진 점은 나에게 더 이상 제주가 관광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제주에서 한 달을 살았으면 좋겠어, 같은 막연한 로망을 꿈꾸기보다 년(年)세 같은 구체적인 개념이 더 와 닿고, 어디가 맛있을지 하는 고민과 인터넷 검색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역시 직장인이 많은 곳에 먹을 만한 가게도 많다는 진리와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제주는 그냥 사람이 사는 곳일 뿐이다.

그래서 이번에 제주 내려가면 뭐할 거냐고 묻는 동생에게 특별한 일정 없이 수국이나 보고 오겠다며 몇 주 전에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오히려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와 나를 놀래켰다.


“까다롭다, 까다로워! 형부 힘들겠다. 차라리 축제가 쉽지!”


그런가, 내가 좀 까탈을 부렸던 걸까. 마음 다 비우고 남편 있는 곳에서 딱 하나, 꽃이 보고 싶었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번 방문에선 수국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슬프지는 않다. 게다가 새로운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어 오히려 기쁜 마음이 든다. 5월에 수국을 보려면 휴애리에서 하는 수국 축제기간에 맞춰 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축제는 끝이 아니라 개화의 시작을 알릴 뿐이라는 것. 그러니 축제기간보다 한 주 늦은 나는 6월 여름 수국을 기다리면 된다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맘에 걸리는 점도 생겼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생기면 남편의 현지 출신 팀원들이 정보력을 총동원하게 된다는 것이 그렇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기 좋아하는 남편에게 내가 오는 시기를 더는 팀원들에게 언급지 말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라는 말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내 얘기를 듣는 건지 마는 건지 팀원이 소개해준 고기국수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내렸던 종달리 해안도로가, 마지막 날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 잠시 들른 절물자연휴양림이 수국을 볼 수 있는 ‘핫 스팟’이라고 하니 너무 빨리 찾아간 것 말고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 이번에 못 봤으면 다음에 보면 되니까. 제주는 또 가면 되니까!

제주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럼에도 질리기는커녕 좋아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걸 지켜보는 타인의 시선으로 어쩌면 제주에 대한 환상이 불러온 착각이 아닐까 싶었던 적이 있다. 작년 초부터 내리 이어진 네 번의 제주도 여행에서 내 생각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여행지가 아닌 삶의 터전으로 이제 막 제대로 제주를 알아가는 우리 부부와 그곳에서 4년을 살아낸 지인 부부는 대화 끝에 서로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한 가지 합의점에 이르게 되었다. 제주는 앞으로도 볼 것이, 알아갈 것이 무궁무진하다고! 심지어 하와이보다도, 오키나와보다도 좋다고! 감히 그렇게 말하겠노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