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제대로 마주하다
제주에 내려오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망설이는 이유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제주에 먹고 살 거리가 많이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택시에서 만난 기사 분 같이 오히려 제주 현지 사람들이 발령도 아니면서 새로이 직장을 얻어 내려온 남편의 상황을 두고 더 신기해하고 잘 된 일이라고들 입을 모았다.
직장을 얻어 제주에 간 것이 정말 잘 된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꼭 ‘제주’에 살고 싶어서 몇 년간 문을 두드려 가게 된 것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얻은 자리였을 뿐이어서 내심 좋으면서도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게다가 남편이 직장을 잡게 되면 부인과 자녀가 함께 살던 집을 정리해 함께 내려오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인데 와이프는 평생 다닐 수 있는 직장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하고, 아이는 혼자 시골 살이를 시작했으니 그 시작이 평탄치만은 않았다.
기러기 아빠가 아니라 스스로 기러기가 되어 떠나 가족과 떨어져 사는 남편은 순간순간 찾아오는 외로움에 혼자 버둥거리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니 주말마다 불러 식사를 챙겨주고 골프 치러 가자고 놀아주는 팀원들이 아니었다면, 면접을 보는 동안 잠시 머물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제주의 자유 영혼’ 형님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몇 년 전에 내려와 자기 앞가림을 하며 버텨 낸 지인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은 비단 남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제주에 적응하지 못하고 1~2년 사이에 겨우 커리어만 쌓고 그렇게 떠난 이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회사 사람들은 남편이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까 싶어 마음을 주지 못하고 스스로를 방어하기도 했다가 한 편으로는 버티는 모양새가 안쓰러워 걱정을 하기도 하며 이것저것 챙기기도 했다.
‘외롭다 한들 처자식 여기 다 두고 중동 건설현장에서 몇 개월씩 버티는 동창만 하겠어? 남동생인 작은 삼촌도 배 위에서 세상 다 잊고 돈 벌다 왔잖아!’ 문득 드는 생각을 다 내뱉을 수는 없었다. 비교만큼 어리석은 게 또 있을까? 하고 싶은 말을 아껴 언제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라는 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외로움의 종류와 무게가 다르다고 해서 쉬운 외로움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주말의 개수를 세어 짬을 내어 내려가면 아이처럼 반기는 남편이 측은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뜬금없이 영화관엘 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치킨도 시켜먹고 싶다고 했다. 두 가지 모두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할 때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일상의 삶에서 너무나 흔하디 흔한 그 두 가지가 남들이 다 부럽다는 제주에서 하고 싶다니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저녁을 양껏 먹은 탓에 차마 치킨을 시켜먹을 수는 없었고 둘 중 하나는 해주고 싶어 끝까지 망설이던 영화관을 찾았다. 졸린 눈을 비비며 본 영화는 남편도 머쓱해할 만큼 진심으로 재미가 없었다. 멀티플렉스가 들어와 있어 여기서 영화를 보나 제주에서 보나 특별히 다른 점은 없다는 점이 새롭다면 새로웠다. 그렇게 남편을 배려한 5월의 제주 이후로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제주에 오면 올수록 할 것들은 명료해지고 동선은 단순해졌다. 비행기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남편 차를 타고 도로를 내달렸다. 지난달에 못 본 수국을 보여주겠다고 하는 남편은 약간 상기된 듯했다. 목적지라 예상했던 종달리는 지금 시간에는 정체가 심한 구간이라 자신이 공부해서 찾아낸 길가에 핀 소박한 수국을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정말 너무 소박하고 초라해서 차마 거짓으로라도 탄성을 지어낼 수가 없었다.
“어, 어 수국이네. 근데 먼지를 뒤집어썼나 봐. 뭐 딱 이쁘고 그렇진 않으네.”
내 말의 뉘앙스를 알아챈 남편은 고대로 처제에게 전하라며 짧은 서운함을 내비쳤지만 굴하지 않고 주변 해변가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김녕 해수욕장이었다. 물빛이 옅고 해안선이 고왔다. 아, 여기가 김녕이구나. 보자마자 신혼 초 부모님을 모시고 왔던 곳이라는 기억이 떠올랐다. 저기서 멍게 먹었었고, 예전엔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지나쳤는데 이젠 다 알 것만 같은 기분과 몰랐던 때와의 기억이 뒤엉켜 감회가 새로웠다.
차를 세워 둔 곳 근처에 신발을 벗어두고 맨발로 가볍게 해안가를 걸었다. 모래가 폭폭 하니 발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 모든 것이 김포에서 비행기를 탄지 단 두 시간도 안 된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것이라니 내 눈 앞에 펼쳐진 일들이 너무나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무척이나 기분이 가벼워졌다. 주말 내내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 탓이었는지 사람들이 붐비지는 않았고 다행히 오전에 내리던 비도 그친 뒤였다. 셀프 웨딩 촬영을 하는 커플과 한껏 멋을 부리고 인생 사진을 노리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좋을 때네.’ 모든 게 평화롭고 너무나 예뻐 보였다. 나도 사진 몇 장을 찍은 뒤 발바닥의 모래를 툭툭 털며 저녁 메뉴를 고르는데 남편이 추천한 메뉴를 듣고 망설이다 결국은 장어를 먹자고 했다. 예전에는 제주에서 장어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었다. 늘 머릿속을 맴도는 건 흑돼지와 갈치조림이었다. 그러다 영귤차를 구입한 남편 회사 근처에서 장어집을 발견하고는 즉흥적으로 낸 제안이었다. 망설이는 남편에게 난 영화도 혼자 볼 수 있고 치킨도 혼자 먹을 수 있는데 장어는 혼자 먹으러 갈 수가 없었노라고 고백을 했다.
장어 하나로 우린 서로에게 너무나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못 다한 각자 근황을 이어나갔다. 알고 보니 남편 입사 첫 회식을 해준 곳이 바로 이 장어집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의미가 되어 돌아오는 듯한 생각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든든한 식사로 마음이 편해진 우리 부부는 집에서 영화 한 편을 시청하고는 이번 6월 제주에서의 ‘핵심 일정’을 하루 앞두고 고요하게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