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 좀 들어주세요 제발|저자 하인츠 야니쉬
나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다. 주로 듣고 리액션을 하는 포지션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한테나 쉽게 내 마음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속에 한 번 감정들이 쌓이기 시작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어느 순간 ‘누군가 들어줬으면’ 하는 욕구로 터져 나온다.
『내 말 좀 들어주세요 제발』 속 주인공처럼, 나도 종종 이렇게 속으로 외친다.
“제발, 내 얘기 좀 들어주세요. 판단 말고, 충고 말고, 그냥 들어주세요.”
양극성장애 2형을 앓는 내 하루는 감정의 고저가 비교적 잔잔해 보일 때도 있지만, 속에서는 롤러코스터가 멈추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갔다 내려가고, 때로는 그 낙폭이 너무 커서 스스로도 그 원인을 찾지 못한다. 그럴 때 내가 바라는 건 치료자나 상담자, 친구, 연인 중 누군가가 ‘조용히 내 말의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경험상, 무작정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오히려 관계가 무너진 적도 있다. 그들은 나를 위로하려다 지쳐버렸고, 나는 그들의 침묵이 ‘이제 그만하라’는 거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경청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
내가 원하는 경청은 단순히 귀를 기울이는 행위가 아니다. 그건 ‘네 말 다 이해해’라는 동의도, ‘이렇게 해봐’라는 조언도 필요 없는 시간이다. 경청은 내 마음에 안전한 의자를 놓아주는 일과 같다. 내가 그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 필요한 만큼만 이야기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맞아” “그럴 수 있겠다”
이런 짧은 반응이면 충분하다.
내 말이 옳다는 보장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느끼는 감정이 부정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대답은 없어도 된다. 하지만 ‘존재’는 필요하다. 화면 속 영상통화든, 옆자리에서 손을 잡아주는 것이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존재.
내 이야기를 아무 제한 없이 들어주는 사람은 처음엔 천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표정에서 지침이 묻어나기 시작한다. 그 지침은 곧 죄책감으로 돌아온다.
“내가 너무 많이 짐을 지운 건 아닐까?”
“이 사람이 나 때문에 더 힘들어지진 않았을까?”
그리고 최악의 경우, 나는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자책에 빠진다.
마치 내가 부정적인 말과 감정을 쏟아낼수록, 그 사람의 그릇에 시꺼먼 것들이 쌓여가는 느낌. 이건 듣는 사람에게도, 말하는 나에게도 독이 된다. 나를 위해 무리해서 들어주는 사람은 결국 나를 피하게 되고, 나는 또 버려졌다는 상처를 받는다.
그 악순환을 끊으려면 ‘경계 있는 경청’이 필요하다.
경계란, 단순히 “지금은 못 들어”라고 거절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경청의 방식과 범위를 미리 합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간의 경계 : “오늘은 30분만 이야기하자.”
주제의 경계 : “이 주제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워, 다른 방식으로 풀면 좋겠어.”
감정의 경계 : “네 감정은 존중하지만, 내가 휘말리지 않도록 잠깐 호흡을 맞추자.”
이런 합의는 ‘냉정한 차단’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관계’로 가는 장치다. 오히려 이런 경계가 있을 때 나는 더 안심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소모시키고 있다는 불안을 덜 수 있으니까.
나에게 이상적인 경청자는 ‘적당한 질문’을 해주는 사람이다. 그 질문은 내 말의 깊이를 더하고, 때로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마음속 구석을 비춰준다.
예를 들어,
“그때 네 몸은 어떤 느낌이었어?”
“그 말을 듣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뭐였어?”
이런 질문은 단순히 사건이 아니라 감정을 탐색하게 만든다.
그리고 중요한 건 ‘쉼표’다. 내 말을 끊지 않는 침묵, 내가 울음을 삼킬 시간을 주는 여유, 대화 중간에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
또 하나, 경청자는 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너무 가까이 와서 같이 무너져버리면, 나도 그 사람을 지켜줄 힘이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잘 들어주면서도 자기 삶의 중심을 지키는 사람을 신뢰한다.
경청은 일방향이 아니어야 한다. 내가 말만 하고 듣지 않는다면, 그건 경청이 아니라 배출이다. 나도 상대의 말을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그게 아주 가벼운 일상 얘기라도, 오늘 아침에 본 하늘 얘기라도.
이렇게 서로 듣고, 서로 숨 쉬는 관계가 오래간다. 물론, 내가 힘든 시기에는 듣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럴 땐 “지금은 많이 못 들어줄 것 같아, 그래도 네 얘기가 궁금해”라는 솔직함이 필요하다.
그 솔직함이 우리 관계의 신뢰를 지킨다.
돌아보면, 나를 살린 건 조언이 아니라 경청이었다. 정답 대신, 나를 판단하지 않는 시선.
끝까지 함께 앉아 있어 준 침묵. 그런 순간들이 모여서, 나는 나를 다시 믿을 수 있게 됐다.
경청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온기다. 하지만 그 온기가 오래 지속되려면, 불씨를 너무 세게 태우지 않아야 한다. 나를 들어주는 사람도, 나 자신도 타버리지 않도록.
그 균형을 지킬 때, 우리는 서로의 삶 속에서 오래 머물 수 있다.
이 글을 쓰며 나는 알았다.
내가 바라는 건 “무제한 들어주는 귀”가 아니라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귀”라는 걸.
당신이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줬던 그날, 나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