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대 입시를 준비하는 분들께
안녕하십니까. 후배님이 쓰신 블로그의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읽어봤는데, 답답한 마음이 들어 늦게나마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한 두 번 만난 적이 있어서 후배님의 연락처도 알고 있지만, 사적인 조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계기로 한의계의 미래를 위한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공개적으로 글을 남기게 된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먼저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1984년생으로 소위 ’허준 세대’의 한의사입니다. 드라마 ‘허준’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한의사의 꿈을 키웠지만, 고3때 수능점수가 부족해서 한의대에 못가고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에 입학했습니다(당시의 한의대 위상은 그랬습니다). 원하던 전공이 아니었기에 학교생활은 재미가 없었습니다. 전공수업은 제대로 듣지 않고, 재밌어 보이는 교양수업만 찾아다니며 방황을 했습니다. 결국 휴학까지 한 학기 하며 방황을 한 끝에 다시 한의대에 도전하기 위해 수능을 봤고, 가까스로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동신대' 한의대에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두번째 학교 생활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드라마를 보며 꿈꿨던 멋진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도표, 그림 하나 없는 온통 한자 투성이의 교과서들, 암기 위주의 시험, 권위적인 교수님들, 다른 과와 교류없는 폐쇄적인 학과생활 등 저에겐 모든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이런 불만과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학교 외부의 활동을 많이 하면서, 수 차례의 유급 위기를 넘기고 6년 만에 꾸역꾸역 졸업을 하고 한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학교생활을 견뎌가며 6년만에 한의사 면허증을 받았지만 마음속에 아쉬움이 계속 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한방무당”, “한약에 스테로이드 넣는다면서요?”, “한약 먹으면 간수치 높아진다던데..” 같은 얘기를 종종 들었고, 정형외과 개원의인 사촌형에게 진지하게 “한의사는 먹고살기 힘드니 의전원에 입학하라”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티비에 나오는 한의사 선배님들의 모습도 "귀를 보니 정력이 약할것 같다"고 말하며 희화화 되거나, "이 음식의 효능은 동의보감에 ㅇㅇㅇ라고 나와있어서 효과가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럴때마다 한의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답답했고, 명쾌하게 해명하거나 받아칠수 없는 제 자신이 싫었습니다. 한의학에 대한 애정과 믿음은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정도의 확신과 지식은 없었습니다.
서양의학은 학교교육부터 PBL(Problem based Learning)로 변해가고 있고, 앱스토어만 봐도 수많은 고퀄리티의 3D 해부학 앱들이 있고, 전자책도 많습니다. 거기다 Doximity나 Figure1같이 의사들의 정보교류를 위한 훌륭한 스타트업도 많이 생기고 있는데, 한의학은 왜 아직도 이런 수준인가... 비교할 때마다 한숨이 나오고,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지루하고도 긴 공중보건의 생활을 게임과 늦잠으로 보내다가 문득 ‘불평만 하지말고 내가 직접 만들어보자’라는 결심을 하고, 앱 개발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앱 개발은 생각보다 성취감도 있고 아주 재밌었습니다. ‘방약합편’이라는 처방집을 앱으로 만들어보려고 시작했다가, 욕심이 나서 동의보감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데이터베이스의 기초도 모르던 상태에서 책과 구글 검색을 통해 독학으로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정리를 했습니다. 동의보감의 한줄한줄마다 번호를 매기고, 원문과 처방, 약재, 단방을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연결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남은 공보의 생활 2년 동안 하루에 10시간씩 했습니다. 2년 동안 개고생을 했지만, 완성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아 있었고, 결과물이 없기에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진로에 대한 고민 끝에 한의원에 부원장으로 취업을 했습니다. 공보의 때 진료경험이 있었기에 자신감이 넘쳤지만, 실제 한의원에서 진료를 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크고 작은 사고도 많이 치고, 모르는 것 투성이였습니다. 하지만 인품이 훌륭한 원장님을 만나서 1년동안 한의사로서 알아야할 A-Z를 새로 배웠습니다. 그 원장님을 지금도 인간적으로, 한의사로서 존경하고 있습니다. 학생 때 무시하던, 공보의 때 무시하던 그 로컬 원장님들 모두 매일매일 열심히 진료하고 계십니다. 의업(醫業)으로 살아간다는 건 정말 존경할 만한 일입니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부원장 생활 1년을 마치고, 미처 완성하지 못한 앱을 완성해서 사업화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딱 1년만 열심히 도전해보고, 안되면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오전에는 요양병원에 가서 알바를 하고, 오후에는 동네 카페에서 노트북을 펴고 코딩을 하기를 몇 개월.... 작년 2월에 드디어 ’방약합편’이라는 심플한 아이폰 앱을 완성했습니다.
그 앱을 기반으로 서로 정보를 교류하고, 토론도 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발전시켜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수익까지 만들어낸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벤처캐피탈도 만나고, 정부지원사업도 지원했지만, 항상 시장이 너무 작다, 한의사들은 보수적이어서 사업화가 어려울거라고 외면당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던 차에 운좋게 한방병원을 운영하는 한의사 선배님을 만나서 투자를 받고 새로운 회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인수금도 받았지만, 이사장님의 꿈과 배포에 감동받아 인수금 8천만원 전액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혼자서 고민하고, 골방에서 혼자 데이터베이스를 정리하던 공보의 시절에 제가 창피하게 생각하던 한의학은 한의학의 일부였습니다. 저 스스로의 고민과 노력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하면서 한의계에서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계신 멋진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우선, 임상 한의사들이 직접 글을 쓰고, 편집하고, 돈을 모아 잡지도 발행하고, 한의학콘서트도 열면서 계속 발전해나가고 있는 ‘한의정보협동조합’이 있습니다. 그리고 체계적인 진료와 교육을 추구하며 컨텐츠를 쌓아가고 있는 ‘프리인턴(Pre-Intern)’도 있습니다. 논문 등의 학술정보를 정리하고, 연구자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는 한의약융합연구정보센터(KMCRIC)도 있습니다.
남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화상치료라는 분야에 10년 넘게 종사하면서 사명감을 가지고 한의 치료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감동적인 원장님도 만났습니다. 이번 가을부터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대학원에서 침과 경락의 기전을 밝히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교수님, 대학원생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국내외의 한의학 관련 논문을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리고 계시는 원장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 분, 한 분 모두 존경스러운 분들입니다.
가장 뒤쳐져있던 학교 교육도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한국한의학교육평가원(IKMEE)도 국시문제 공개, 한의대인증평가 등을 위해 열심히 하고 있고, 부산대한의전 같은 연구중심의 학교가 좋은 롤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한의학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더이상 ‘한방무당’이라고 조롱당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여전히 ‘안아키’같이 말도안되는 걸 한의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제는 그런 분들을 걸러낼 수 있는 자정능력도 생기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위대한 한 명이 등장해서 바꾸거나, 특정 집단, 특정 회사의 노력만으로 바뀐 것이 아닙니다. 목마른 분들이 스스로 우물을 파고, 그 우물들을 합쳐서 더 크고 깊은 우물을 만들어 나가고 있기에 가능한 변화들입니다.
내가 저질렀던 실수를 내 후배는 하지 않도록, 내가 공부해서 좋은 것을 남들도 쓸 수 있도록 함께 토론하고, 공유하고, 응원하고 있기에 가능한 변화입니다. 저희 회사도 이런 공론의 장을 만들기 위해 ‘한의플래닛’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후배님이 아는 한의학은 한의학의 일부입니다. 임상강의를 듣거나 임상 진료를 해보지 않고, 기초 이론수업만 듣고 판단하기에는 섣부르다 생각합니다. 자괴감을 느끼고, 벽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을 때 잠깐 쉬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해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상처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라는 것도 짐작 가능하기에 다시 돌아오라고 쉽게 말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우려스러운 것은, 상처받고 떠난 한 사람의 글로 인해서 한의대 입시를 준비하거나, 한의대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느낄 허탈감과 무기력감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대 한의학'은 매일 발전하고 있습니다. 400년 전의 동의보감을 그대로 읊조리는 것만이 한의학이 아닙니다. 한의대는 의대에 못간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도 매일 진료 현장에서 치열하게 일하면서 한의학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25,000명의 한의사 선배님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과 함께 공유와 소통을 통해서 새로운 한의학을 만들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