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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나은 May 16. 2024

미국에서의 출산, 엄마는 오지 않았다

출산 vs 공황장애

 

우리 집. 미국 온 지 십 년째 되던 해의 "내 집마련"


어린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이 꽤 많이 사는 동네로 이사를 온 것이 두 해 전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콜로라도로, 콜로라도에서 사우스 캐롤라이나인 이곳으로 이렇게 미국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을 해 왔다. 해가 지는 곳에서 해가 뜨는 곳을 향해 왔다고 해도 될까. 어쨌거나 우리로서는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적당한 곳을 찾아 떠나온 여정이었기 때문에 모든 결정의 순간들에 최선을 다해서 고민했고, 그 최상의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라고 믿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삶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닌가. 지나온 내가 했던 선택과 결정들이 그때의 나로서는 최선이었다고 믿어주는 수밖에는..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삶은 너무나 가혹해 보이니까.



삼 형제, 내 대장보쓰들

바로 전 글에서 첫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조금 썼고, 이 글에서 그때로부터 시간을 후울쩍 건너온 지금의 시점에서 쓴다. 그 시절의 내가 전혀 상상해 보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나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아주 건강하고 밝고 명랑한 세 남자아이의 엄마가. 삼 형제를 둔 엄마가 된 지금의 내 모습을 그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나는 셋째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많이 당황했었다. 아주  부끄럽지만, 이 아이를 낳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매우 무례하고 이기적인 생각도 잠깐 한 적이 있다. 내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기가 특기인 이 소중한 아가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 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싸다구를 열 대를 맞아도 모자란 일이다.





지극히 주관적이긴 하나, 나의 임신과 출산은 세 번 모두 꽤 고독한 편이었다. 물론,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 자체가 결국 산모 혼자서 감당해 내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인 만큼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이 과정들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이겨내 가는 것이라는 걸 알지만, 타인의 큰 병보다 내 손톱에 낀 가시가 더 아프듯이, 나는 때때로 외롭고 서러웠고 기쁘지만 슬펐다. 여러 번 스스로를 다독이고 위로했던 시간들. 괜찮아, 별 거 아니야, 잘할 수 있어.


한 번의 유도분만과 두 번의 제왕절개로 아이들을 낳았다. ‘조리원’이란 곳이 있다는 것 자체를 신기해하는 미국인 남편과 아기 낳느라 고생했다고 차가운 얼음이 가득 든 크렌베리 주스를 건네주는 미국 사람들로 둘러싸인 내가 산후조리를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불합리한 사치인 듯 느껴졌다. 여왕처럼 떠 받으려 지고 싶은 것은 아녔어도, 아기를 낳고 난 당분간 만이라도 그저 조금 편안하게 몸을 회복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하지만 내 바람은 매 번 바람처럼 흘려보내야 하는 여리고 작은 꽃잎 같은 것이었다. 꽃잎처럼, 그리운 한국에서의 봄날 우수수 떨어지던 분홍빛 하얀 벚꽃잎처럼 그렇게 날려 보내야 하는.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아프고 고통스럽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느껴본 신체적인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이었다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산후조리'라는 정당한 타이틀 아래에서 앞으로 걸어가야 할 '육아'라는 긴 여정을 앞에 두고 최대한으로 기력을 회복해 두고 싶었다. 단 한 달, 혹은 이 주만이라도. 첫째와 둘째를 출산하던 때에는 동생이 한국에서 와서 삼 주 정도 내 곁에 머물러 주었다. 아기와 함께 하는 밤이 온전히 나의 몫이긴 했지만, 바로 옆방에서 내 동생이 자고 있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엄마는 세 번의 출산 때 모두

오시지 않았다.







아기를 낳은 것을 알고 라스 베가스에 사시는 큰 이모께서 내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 주셨었다. 너도 이제 엄마가 되었으니 엄마 마음 알겠구나 하시면서.

엄마가 되고 보니 엄마 마음을 더 모르겠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출산이 이런 것임을 나보다 더 잘 알았을 엄마가 어떻게 미국에 오시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그런 엄마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조금 더 나를 위해 용기 내어 줄 수는 없었느냐고. 이런 내가 안쓰럽지도 않으냐고.


작년에 부모님과 동생이 미국에 초대했을 때,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

 사실 그 순간들에 누구보다 보고 싶었던 것은 엄마였다. 한껏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서리치게 아프다고, 엄만 어떻게 나를 낳았느냐고, 뭐 이런 고통이 다 있느냐고 엄마 품에 파고들어 엉엉 울고 싶었다. 나는 이제 엄마가 되었으니 누구보다 강해져야 했지만, 누구보다 가장 약한 존재가 되어버려서 지금 이런 순간에도 나를 무너지지 않게 지켜줄 유일한 존재인 내 엄마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간절한 엄마 품에 파고드는 것 대신에 내 품이 간절한 나의 아기를 안아 올렸다. 아가는 울다가도 내 품에만 들어오면 금세 뚝 눈물을 그쳤다. 내 품 안에서만큼은 세상 편안한 얼굴로 잠에 들곤 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엄마였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한껏 나의 품을 내어주는 것뿐이었다. 아가는 오로지 내 품이어야 만 했다. (세 녀석들 모두..) 내 품에만 있으면 아가의 세상은 온전해진 듯 보였다. 수천번을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내 품에 전부를 맡긴 얼굴들이란.


넘버 원
넘버 투
넘버 뜨리







 엄마의 공황장애가 얼마나 심각했었는가 하는 것은 지금도 잘 모른다. 엄마는 당신의 그런 깊은 속내는 잘 드러내질 않는다. 늘 그랬다. 그래서, 막연히 추측만 할 뿐. 서운하지 않았다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러나,

엄마를 원망하진 않는다.








더 쓰고 싶은 말들이 있었는데, 막둥이가 깨 버렸다.

내 품을 내어주지 않고서는 저 울음을 그치기가 힘들 것 같으니 아기를 안으러 가봐야지.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만,

마음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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