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마리아인은 없다

by 백건


착한 사마리아인은 없다


현대 뇌과학자들은 ‘자아(self)’를 더 이상 하나의 단단하고 변치 않는 중심으로 보지 않는다. 자아는 하나의 통일된 실체라기보다, 각기 다른 기억·정서·습관·충동이 느슨하게 묶인 ‘밴드(band)’ 혹은 ‘묶음(bundle)’에 가깝다는 설명이 힘을 얻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일관된 존재가 아니라, 여러 심리적 조각이 어떤 순간에는 조화롭게, 어떤 순간에는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진폭이 있는 파동에 가깝다. 어떤 날엔 너그러울 수 있지만, 다른 날엔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는 본질적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조합된 상태의 결과라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도 비슷한 통찰을 오래전에 제시했다. 그는 인간에게 타고난 미덕이나 본성적 선함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습관과 훈련을 통해 꾸준히 ‘좋아지려고 노력할 때만’ 덕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세네카에 따르면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은 흔히 회자되는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순수한 타고난 선은 환상일 수 있으며, 우리가 기대하는 선행은 대부분 축적된 수련 혹은 교육의 결과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날 회사에서 지하철로 귀가하던 직장인이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날의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매너 좋은 시민’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정작 전날까지는 짜증과 피로 때문에 같은 상황에서도 애써 외면했었던 사람일 수 있다. 이렇듯 한 번의 행동이 그 사람의 본질을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매일 의식적으로 배려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분노나 피로를 다스리려 훈련한다면, 이렇게 반복되는 작은 선택들이 그를 점차 ‘미덕의 습관’을 가진 사람으로 만든다. 즉, 선행은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반복된 결심의 결과물이다.


세네카는 이러한 주장을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 “미덕은 자연이 주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 행위가 쌓여 이루어진다.” 그는 어떤 사람이 ‘원래부터 마음씨가 좋다’고 말하는 것을 경계했다. 태생적 성품을 칭송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타고난 상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선택하는 방식, 그리고 그 선택을 꾸준히 이어가는 힘에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착함과 선행을 일종의 정체성으로 소비하려는 경향이 있다. 봉사활동을 인증 사진으로 남기거나, 선행을 SNS에 공유하며 ‘좋은 사람’임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렇게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와, 실제 덕을 쌓는 과정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세네카의 관점에서 본다면, 선행의 가치는 ‘어떻게 보여지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반복되는가’에 달려 있다.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든지 다른 조각들이 튀어나와 이기적이고 충동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인간의 자아가 ‘묶음’이라는 현대 뇌과학적 이론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세네카는 이렇게 꾸준한 수련을 강조했을까? 그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미덕과 거리가 먼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곤하면 예민해지고, 두려우면 비겁해지고, 화가 나면 자기중심적이 된다. 하지만 세네카는 이런 인간의 불완전함을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완전하기 때문에 미덕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미덕을 향한 훈련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국 “착한 사마리아인은 없다”라는 말은 냉소적 결론이 라기보다는 오히려 희망의 메시지다. 태어날 때부터 선한 사람은 없지만, 누구든 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자아의 여러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언제든 더 나은 조각을 선택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덕은 우연히 주어지는 품성의 선물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선택하고 실천하며 쌓아 올리는 작은 돌탑과 같다. 그리고 바로 그 꾸준한 쌓임이 우리를 더 견고한 존재로 만든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태어나지 않지만, 익숙해진 미덕의 습관 속에서 천천히 만들어진다. 스토아 철학은 그 길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오늘의 작은 선택이 내일의 더 나은 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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