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뒤에는 ‘춘갑봉’이라는 야트막한 산이 있다. 주택가 건너편으로 길을 건너, 조그마한 외 길을 자분자분 걸어가다 보면, 나지막한 집들이 몇 채 나오고 길 좌우에서 웡웡 옆집 윗집 멍멍이들이 짖는다. “안녕?” “잘 지냈어?” 다정히 묻는 안부에 종종 ‘으르렁’으로 답을 하는 성깔 있는 녀석들도 있지만, 길 중간쯤 가다 보면 발자국 소리를 어찌 알고 달려오는지, 함께 산책하는 친구와 내가 ‘삥둘이들’이라고 부르는 강아지 자매가 반겨준다. 이 녀석들에게 삥둘이라고 붙여주게 된 이유는, 이렇게 친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만 보면 제자리에서 삥삥 돌면서 위협하듯 왕왕 짖어대는 모습이, 무섭기는커녕 자꾸 웃음이 나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우리는 춘갑봉까지 가는 내내 만나는 강아지들, 툇마루 위에 앉아 햇빛을 즐기는 턱수염 무늬 고양이, 경쾌하게 재조잘 거리는 전깃줄 참새 떼들과, 팔랑거리며 머리 위에 나부끼는 어여쁜 나비들, 걷다 보면 불쑥 길 한가운데로 날아와 무뚝하게 앉아있는 송장 메뚜기, 세월아 네월아 느릿한 듯 보이지만, 이 녀석 ‘순간 이동’을 하는 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빠른(!) 몸놀림으로, 거친 시멘트 길 한복판을 가로질러 어느새 숲 속이 시작되는 포실한 흙 땅에 착, 제 몸을 들여놓고 있는 달팽이까지, 자칫 밟힐까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이 작은 숲속으로 가는 길 위에서 만나는 거의 대부분의 생명체들과 인사를 나눈다.
삥둘이네 집은 춘갑봉에 도착하기까지 중간 포인트 지점이 된다. 여기서 삥둘이들과 살갑게 인사를 나눈 후 고개를 들면, 집 뒤로 시원시원하게 뻗은 금강송들이 늘씬한 몸매와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하며 훌륭한 포즈로 서 있다. “오늘도 안녕?” 멋쟁이 금강송들에게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이제 시야에 훤히 들어오는, 길 좌우 산등성이에 곧게 뻗은 소나무들의 집회, 이 짙은 녹음 사이로 유유히 걸어 들어가는 나는, 또 ‘누굴’ 만나게 될지 설렌다. 이곳엔 소나무들만 사는 게 아니다. 신기하게도 하나하나 이름이 다 있는 나무들, 여름부터 살짝 단풍이 드는 나무도 있고, 사계절 내내 초록을 띠는 나무도 있다. 여름 내내 이 산에 살다가 겨울이면 사라지는 풀들도 모두 이름이 있고, 존재감이 있다.
나무는 덩치가 크다고 풀들을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제 주변에 풍성히 피어나게 자리를 허락한다. 숲속으로 들어가면 담쟁, 칡덩굴들은 길게 길게 뻗어 나가는 줄기와 너른 잎으로 나무들을 휘휘 감아 돌며 노닌다. 나무의 굵은 둥치와 쭉 곧게 뻗은 몸매를 보면, 제 곁에 아무도 범접 못하게 도도하게 굴 것 같지만, 빈약한 몸매로 땅 위를 기어다니는 담쟁 덩굴과도 유유자적 잘 어우러진다. 수학에 빼어난 재능을 가진 듯 멋스런 프랙털을 뽑아내는 고사리의 잎과, 매우 다정하고 낭만적으로 생긴 방풍나물의 이파리들이 한 숲에서 산다. 숲속을 거닐면서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참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들이 엉킴도 없이 존재한다.
숲에서는 모두가 삶에 진심이다. 그래서 서로를 존중한다. 그리고 모두가 각자에게 삶의 자리를 내어준다. 존재함 만으로 적절히 서로를 격려하고 보살핀다. 그들에게는 서로가 ‘존재’와 ‘다름’을 불편해하는 느낌이 없다. 오히려 서로 다름으로 존재하기에 행복한 느낌이다.
숲으로 향하는 작은 길 위, 그 짧은 시간에 만나게 되는 생명체의 종류는 손가락 열 개를 넘어선다. 숲으로 들어서면 발가락을 다 동원해도 셀 수가 없다. 누군가는 이 숲에서 ‘약육강식’의 생태계를 말하며 비정한 현실에 직면해서 살아남으라는 교훈을 찾아내기도 하겠지만, 내가 날마다 이 숲에 들어서며 배우고 터득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다.
생명감수성.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아직 ‘생명감수성’이라는 단어가 없다. 그러나 나는 꼭 필요하다고 본다.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감수성 앞에 굳이 ‘생명’을 붙여 부르려는 이유는, 숲속에만 가면 넘쳐나는 이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유독 ‘인간계’에서는 희박해져 가는 것만 같으니 비단, 나만 느끼는 것일까?
십 대 미혼모가 아기를 공중 화장실에서 낳고 그대로 버려두었다는 기사는 매우 충격적이다. 항상 1등만 하던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1등 자리를 2등에게 빼앗겼다고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마치 지어낸 것만 같다. 동물 N 번 방에서 초등학생들의 채팅이라는 캡처 화면에서는 생명의 냄새도 인간의 냄새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중학교 같은 학급 친구를, 또래 친구들이 무리 지어 담뱃불로 살을 지지며 괴롭힐 수 있는 생명에 대한 무감각이, 치가 떨리게 끔찍하다. 우크라이나, 가자 지구, 아프리카 곳곳의 내전, 자기 생명이든 남의 생명이든,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결여된 ‘무(無)’ 감수성에 대해 온몸으로 비통함을 느낀다. 지금 우리 ‘인간(人間)’ 사이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숲에 가면 생명이 넘친다. 허투루 존재하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다. 이미 존재함 자체로 삶의 이유를 가진다. 단 며칠을 살다 사라지는 풀벌레 하나조차도 자기 삶에 진심을 다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이들은 생명에 대해 무지하다 못해 무가치하게 느끼는 것 같다.
어쩌면 이들 곁에는 생명감수성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숲’이... 없는 게 아닐까?
항시 곁에 있어 언제든 찾아가도 좋을, 생명력 충만한 숲이 인간 사이사이에 있어 생명감수성을 충족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오늘날의 만물의 영장들이 오히려 만물들에게 다시금, ‘생명’에 대한 깨우침을 청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명이 생명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순수한 기쁨, 감탄, 사랑, 존경. 나는 그것을 숲에서 배웠다. 자그마한 자기 몸에 깃든 생명에 조차도 진심을 다하는 벌레를 관찰하고, 이름 모를 숲속 풀잎들이 생명을 꽃피워내는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들어서, 벌레 하나 제 손으로 죽이는 일이 어려워지고 풀잎 하나 밟는 일이 미안해져야 남의 생명에 손대는 일, ‘전쟁’과 같은 무서운 결정 하나 내리는 일도 어려워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