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산 사이의 좁은 골, 산을 넘어가는 고개를 야커우(垭口)라 한다. 해발 4,658m의 예라산(业拉山) 고개에는 다르초가 무수히 휘날리고 있다. 아무리 봐도 티베트 글자는 까막눈일 텐데 왠지 낯설지 않다. 순결한 영혼을 담은 암호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고원 초원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해발을 점점 낮출 것 같은 세찬 바람을 따라 어디론가 영원히 떠나갈 것처럼 다르초에 새긴 부처의 바람은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다.
예라산 고개의 다르초
고개를 넘자, 펼쳐놓은 시야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새파란 하늘로 햇살이 비친 산에는 굽이굽이 감도는 길이 이리저리 금을 그은 듯 나부끼고 있다. 가로와 세로로 오가며 오르내리는 길이 통째로 산을 다 삼킨 듯하다. 도대체 이 길은 누가 만들었으며, 만든 사람은 이 길을 뭐라 부르는 것인가? 뒤로 돌아보니 “天 路 ★ 72 拐”라고 별까지 붙여서 매달아 놓은 글씨가 보인다. 어림잡아 3m 정도인 쇠기둥을 다섯 개나 세웠다. 하늘로 오르는 길, 과이(拐, bend)는회전이니 72번이나 돌고 돌아야 도달하는 길. 그런데 굳이 별은 왜?
대명정정(大名鼎鼎)한 천로는 이름도 가지가지다. 산너머 강을 빌려 ‘노강(怒江) 72과이(拐)’라고도 한다. 99나 108을 붙이기도 한다. 정확하게 72번 급커브 하는지는 몰라도 숫자가 주는 의미에는 약간씩 차이가 느껴진다. 99는 ‘구구(久久)와 발음이 같아 한없이 가야 하며 108은 중생의 번뇌처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일 터, 제목인지 가사인지 모를 ‘돌고 도는 인생’이 시나브로 떠오르는 곳이다. 하늘에 이르면 별이 되는 차마고도일까? 하루의 밤이건 기나긴 인생이건 이 순간만큼은 별이 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천로72과이
천로72과이 표지판
길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 바닥에 걸터앉아 도화지와 천로를 나눠 보며 색감을 덧칠하는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여기에 선 사람 모두 어쩌면 한 가지 생각일지 모른다. 인생의 길을 떠올리며 천년 세월을 공들여 ‘성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마방을 생각할 것이다. 가파른 길을 오르려면 도대체 얼마가 고통스러웠을까? 거꾸로 오른다고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다. 길을 따라 그저 내려가면 되니 다행이다.
천로를 그리는 사람
천로를 달리는 사람
자동차도 가고 오토바이도 가고 화물차도 간다. 자전거도 가고 트랙터도 간다. 길은 뜻밖에 평탄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순조롭게 흐르는 시간처럼. 그러다 보면 급하게 돌아가야 할 때를 만난다. 인생 공부를 떠올리며 구비구비 약 12km를 내려오는데 걸린 시간은 딱 30분. 4,600m에서 3,100m로 내려오는데 반 시간이라니 다소 허무하다. 2010년에 아스팔트 길이 완성됐다. 문명은 허탈일까 감사일까? 길을다 내려온 후 후회막급,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길을 걸어 내려오고 싶었던 것이다. 단 1km만이라도 걸었다면 좋았을 걸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인생에서 후회는 늘 인간의 간사한 이기심이기도 하다.
협곡 사이로 노강이 유유히 흐른다.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은 황토만이 흘러내린다. 강물은 누런빛으로 흐르고 있다. 청장고원에서 발원한 3개의 강은 각각 머나먼 길을 항해한다. 가장 동쪽의 금사강은 중국을 가로지르는 장강이 되고 가운데 란창강은 메콩강으로 변한다. 그리고 가정 서쪽의 노강은장장 3240km를 흐르는데 티베트와 윈난을 지나 미얀마로 진입해 살윈(Salween) 강이 된다.
노강대협곡 앞에서
노강협곡을 잇는 다리 위를 걷는 사람들
원주민인 노족(怒族)은 ‘아누르메이(阿怒日美)’이라 부르는데 스스로를 ‘아누’라 부르고 ‘르메이’는‘강(江)’을뜻한다. 인구 7만 명 가량의 소수민족 중의 소수인 노족에게피붙이이자 생명수다. 남북으로 흐르는 강이니 서쪽을 향해 가려면 노강교를 건너야 한다. 협곡을 잇고 있는 오래된 다리를 사람들이 건너고 있다. 꽤 위험해 보이건만 사람들은 걱정은 난간에나 묶어 두라는 듯 여유롭다. 협곡 위에 걸쳐 있는 아스팔트 대교를 따라 터널로 진입한다.
노강을 끼고 사는 와다촌
붉은 토양으로 만든 다라신산
강을 끼고 살아가는 자그마한 마을 와다촌(瓦达村)을 지나니 서서히 산세가 완만해진다. 그리고 갑자기 산과 강이 붉은빛을 발산하고 있다. 이름하여 홍산하(红山河)다. 황토와 홍토가 산을 구분하고 산과 평지는 초록의 나무가 접선을 이룬다. 여전히 구름과 하늘은 햇살을 다투고 있다. 이 신비로운 산은 다라신산(多拉神山)이라 불린다. 동과 철, 아연이 많이 매장돼 있다는데 그래서일까? 오후 1시를 달리고 있지만, 아침이나 저녁이면 무지개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환생할지도 모른다.
바쑤(八宿) 현 바이마(白玛) 진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떠난다. 고원지대이자 온대성 스텝(steppe) 기후인데 온천이 많은 동네다. 온천호텔에서 하루 묵어도 좋을 듯하다. 호텔에는 실내 풀장도 있다고 한다.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글 수 있다면 해발 5천 m를 넘나드는 사람에게 재충전을 위한 쉼터로 손색이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