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강의 숨

by 새파랑

어린아이 기억의 갈피에 스며든 말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 생명력을 지닌다. 유년의 어느 날, 아버지가 무심코 나에게 흘려보낸 한마디가 까닭 모르게 마음에 자리 잡았다. “김제는 유독 바람이 많지. 드넓은 평야에 바람을 막아설 산 하나 없으니 오죽하겠니.” 과학적 근거는 중요치 않았다. 척박한 나이테를 가진 어린 나였지만 초등학교 하굣길 온몸으로 겪어낸 김제의 바람은 실로 그러했으므로. 나는 그 말을 증명하듯 살았다. 그렇다면 호남평야의 텅 빈 들판을 채우는 이 바람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과학의 논리보다 상상의 나래가 더 익숙했던 나는 멋대로 바람의 여로를 그렸다. 아득한 시베리아 설원에서 태어난 바람이 의주를 넘고 평양을 거쳐, 서울의 소음을 통과했을 것이다. 마침내 길고 긴 땅의 허리인 김제를 지나는 것이라고. 이내 정읍과 영암의 너른 품을 지나 제주의 푸른 바다에 닿아 비로소 긴 숨을 고를 것이라고. 국경이란 허구이니깐 지도 위의 선은 바람이 읽지 못하니깐.


며칠 전, 써야 할 곳 없는 시간이 주어졌다. 자유로운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렇다 할 계획도 없이 국립전주박물관으로 향했다. 고즈넉한 뜨락에는 돌들이 멀뚱히 서 있었다. 곳곳에 문인석들은 자신들도 사람이라고 저마다 다른 얼굴과 표정, 풍채로 묵묵히 서 있었다. 저만치 걸린 현수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특별전시 ’ 나고 드는 땅, 만경과 동진‘. 조각난 단어들이 나를 붙잡았다. 만경. 강물이란 흐르는 것이니 누구의 소유라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 이름은 분명 나의 일부였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선 전시실에는 지도 위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만경강과 동진강이 뿜어내던 뜨거운 역사가 흐르고 있었다. 기록조차 없던 시대부터 유구한 시간을 굽이치며 전라의 젖줄이 되어 온 두 강의 분주했던 역할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의 마지막,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흐르는 만경강의 영상을 보았다. 나는 호명당했다. 저 강에 가야 한다. 하지만 강은 길고, 흐르고, 마침내 바다와 몸을 섞는다. 그 거대한 몸의 어디를 찾아가야 하는가.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러니까 목소리라기보다 목소리의 기억 같은 것이 떠올랐다. 최근 외할아버지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어머니는 마모되는 한 사람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 망해사라는 곳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문장의 끝에 망해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을 흐르는 만경강이 있었다.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망해사로 향하는 길은 세상의 소음이 멀어지는 길이었다. 삼십 분을 넘게 달리는 동안 마주친 차량은 고작 두어 대. 마침내 망해사 앞에서 마주한 만경강. 강의 맨살을 보았다. 내가 딛고 선 이 땅의 속살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잿빛 구름이 수면을 낮게 짓누르고 있었다. 압력 아래, 강은 더욱 아득하고 침묵에 잠겨 있었다. 전율. 차가운 공기의 쾌감이 등뼈를 타고 흘렀다. 세찬 바람이 나를 스쳐 갔지만 사납지 않았다. 바람에도 성질이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피부를 긁고 지나가는 눈물짓게 하는 바람이 있고 서늘함 속에서도 얇은 이불처럼 온몸을 감싸듯 포근히 머무는 바람이 있다. 만경강의 바람은 후자였다. 나는 그저 서 있었다. 땅을 디딘 두 다리와 호흡만이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강의 끝에서 흰 점 하나가 수면을 스치다 허공으로 떠올랐다. 소리 없는 날갯짓과 투명한 궤적을 시선이 따랐다. 하얀 새는 나처럼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이 바람은 시베리아에서 오지 않았다. 나를, 내 고장을 어루만지던 바람의 근원은 만경강. 호수공원 벤치에서 지친 내 눈꺼풀을 가만히 쓸어내리던 감각의 정체. 피로로 잠긴 몸의 관절을 느슨하게 풀어주던 힘. 공허한 명치끝을 채워주던 밀도. 변화 앞에서 얼어붙은 등 뒤를 가만히 짚어주던 손길. 바람이었다. 아버지의 말은 절반의 진실이었다. 토지의 바람은 부재가 아닌 거대한 강의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바람은 결국, 강의 숨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호흡 속에 살아온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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