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뼈

by 새파랑

겨울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문득 오래된 것들이 보고 싶어져 미륵사지로 발길을 향했다. 오랜 세월을 품은 자리가 으레 그렇듯, 그곳에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적막이 감돌았다. 편안한 침묵에 기대어 일부러 걸음을 늦추었다. 묵묵한 모습의 석탑 하나가 나를 맞아주었다. 시간에 닳은 표면과 퇴색된 색상의 미륵사지 석탑. 역사의 긴 영자(影子)가 위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엔 새로 빚어 올린 동원 구층석탑이 뾰족하게 서 있었다. 빛나는 표면과 반듯한 모서리, 팽창한 젊음이었다. 그 윤광은 오래된 석탑의 마모된 색을 더욱 희미하게 만들었다. 잠시 오래된 돌의 사유를 더듬어 보았다. 생기에 대한 질투였을까. 아련한 부러움이었을까. 발바닥에 축축한 상념이 들러붙었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그때, 무언가 내 시선을 잡아챘다. 풍경의 일부인 척 흩어져 있던 돌들. 저것은 군상이 아니었다. 땅의 살갗을 뚫고 솟아난 뼈, 혹은 응고된 침묵 속 역사의 파편들. 나는 더 걸을 수 없었다. 어떤 힘이 나를 그 앞에 세웠다. 이제는 다만 이름 없는 뼈들로 누워있는 무기질들. 한때는 승방이었고, 금당이었고, 누군가의 기도였을 흔적들. 이곳은 돌들의 무덤이었다. 모든 것이 남김없이 썩어 사라진 후에야 완성된 거대한 무덤이었다. 다시 미륵사지였다는 둥근 몸을 정성스레 천천히 걸었다. 스며드는 냉기와 침묵은 망국의 통곡보다 더 차갑고 무거웠다. 늙은 돌은 질투하지 않는다. 슬퍼하지 않는다. 모든 감정이 마모된 끝에 그저 돌이 되었을 뿐이다. 바람에 자신의 살이 닳아 없어지는 것과 그 위에 새로운 살이 돋아나는 것을 견딜 뿐이다. 가운데가 함몰된 주춧돌 하나가 시선을 붙들었다. 지붕의 무게가 짓눌렀을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밟고 갔을 것이다. 그것은 으스러진 척추뼈였다. 그때, 나는 우리네 부모들을 보았다. 그 뼈를 낳은 뼈를, 희생의 근원을 생각했다. 한때는 뜨거웠을 웅장했을 몸들. 이제는 자신의 뼈를 깎아 다음 세대의 길을 열어주는 침묵 속에 존재하는 이들. 축복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몸이 가루가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리라. 저것은 제 몸을 바쳐 완성한 돌의 열반(涅槃)이었다. 나는 굳은 땅에서 발을 떼었다. 오래된 뼈조각들이 잠든 거대한 구덩이 위로 늦가을이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문득 이 무덤의 이름이 미륵이었음을 떠올린다. 미래의 부처가 온다는 약속의 땅, 가장 눈부신 약속이 가장 완전한 폐허가 되었다. 미래를 위한 희생이 이런 방식으로 과거에 박제되는 것일까. 어째서 모든 몸에는 약속된 미래가 오지 않는가. 어떤 어미와 아비의 살점이 찢겨나간 자리에 어째서 새로운 살은 돋지 않는가.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열네 살의 겨울이었다. 맨손으로 가게를 일으켰던 부모. 갓난아기인 나를 업고 바닥을 누볐던 어미의 등. 고등학생 공장 노동자에서 시작한 아비의 어깨. 성실함이 단단한 뼈대였던 나의 부모는 누군가의 기만적인 말 한마디에 부서졌다.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세계가 먼지처럼 내려앉았다. 나는 그 충격 앞에서 새로 전학 갈 학교의 낯선 복도를 떠올렸다. 나의 공포는 언제나 그렇게 작고 이기적이었다. 그때의 부모를 생각하면 차가운 쇠붙이가 목에 걸린다. 당신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느낄 살과 피가 없었는가. 쉬지 않고 제 살을 태우던 젊은 부부의 닳아빠진 몸이 보이지 않았는가.


나의 고운 손을 본다. 부모의 상처를 만져본 적 없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몸은 그 남자뿐이었을까. 나의 질문은 오늘 이 자리 차가운 비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분노는 무력하고 과거는 말이 없다. 남은 것은 기억의 뼈들뿐. 나는 이 뼈들을 내 몸 어디에 묻어야 하는가. 나는 무덤을 등지고 박물관으로 향했다. 축축한 냉기에서 온기가 제어되는 실내의 무균실로. 저곳에 이름과 번호를 부여받은 뼈들이 인공의 빛 아래 잠들어 있다. 나는 묻는다. 그들은 자신을 딛고 나아가라 했지만 우리는 그 끝에 우상을 세웠다. 부모의 상처를 맨손으로 만질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 대신 잘 닦인 돌을 끌어안는다. 그것이 나의 안도이며 가장 이기적인 추모 방식이다. 자식의 몸으로 태어나 언젠가 부모의 몸이 된다. 그 상처와 이해는 이어지지 않고 각자의 몸에서 끝날 날들일까. 아직 내 복부에 다른 생명을 품어본 적 없는 몸으로 나는 그 단절의 깊이를 가늠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