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45
"상상이 괴물을 만든다" 영화 '버닝'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추천받아서 무심코 보게 되었지만, 끝이 나고 더 생각이 들고 여운이 남는 그런 영화를 만났다. 영화가 관통하는 주제가 무엇일까 고심하다가 상상력에 대한 고찰로 이어지게 되었다. 상상과 생각은 그 결이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모든 것이 누군가의 상상력에 의한 결과물이고, 누군가의 의도니까. 누군가의 상상은 곧 현실이 되기도 한다.
영화 '버닝'에서 주인공인 소설가 지망생인 종수는 정말 우연히 고향 친구 해미를 만나게 되는데, 그 인연을 시작으로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을 가는 동안 고양이 밥을 챙겨주게 되고, 아프리카로 떠난 해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는 날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게 된 종수는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알게 된 '렌'이라는 사람과 셋이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렌은 겉으로는 해미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게 행동하지만, 정작 해미가 말을 할 때 하품을 하거나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종수에게 들키고 만다.
파주에 있는 종수의 집에 모이게 된 세 사람은 렌의 권유로 대마초를 피우기 시작하고, 렌은 종수에게 주인 없는 비닐하우스를 불태우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제 곧 불태울 거라고 말하는 렌을 보고 혜미에게 나쁜 짓을 하려고 한다는 불안한 생각을 느끼기 시작한다. 다음 날부터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 해미가 걱정되어 며칠 뒤 렌을 찾아갔지만, 해미와 성격이 비슷한 여성과 함께 있는 렌을 보게 되고 더욱 의심을 하게 된다. 그날 이후로 종수의 집 근처에 있는 주인 없는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니며 해미를 찾아 헤매는 종수는 몰래 렌을 미행하기 시작한다.
우연한 만남을 가장해서 렌의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는데, 전에 왔을 땐 없던 고양이와 해미가 전에 차고 있던 시계가 발견이 되고 종수는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잠시 후 집에 도착한 또 다른 여성을 보고 렌에게 요즘에도 주인 없는 비닐하우스 불태우는지 물어보게 되는데 얼마 전에도 불태웠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렌이 해미를 죽였다고 확신하는 종수는 어느 시골 한적한 곳으로 불러서 렌을 죽이고 차를 불태우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해미의 행방에 대해서 나온 것은 없다. 정말 살인을 당했을지 아니면 또 아프리카로 떠난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렌이 해미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종수가 당연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정작 해미가 차고 있던 시계는 해미를 찾게 되면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도 착용하고 있던 시계였고, 종수는 해미가 기르는 고양이에게 밥만 주었을 뿐이지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몰랐던 종수는 혼자 만들어낸 상상 속에 빠져서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증거들만 찾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렌이 말하는 비닐하우스를 불태운다는 뜻이 과연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었을까, 해미는 정말 죽은 걸까 아니면 어디로 훌쩍 떠난 걸까. 그 어떤 것도 단정 지을 수 없고, 확실한 것도 없었다. 자신의 감정에 심취하고 과몰입했던 것들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서 봐야 하는 것들을 못 보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본질은 흐려지고, 내가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것에 집중하다 보니 사실이 아닌 것들이 사실이 되어버리고, 그로 인해서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어쩌면 괴물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정해야 하는 것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가 항상 옳다고 믿는다면 꽤나 자주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나 또한 살면서 종종 과도한 상상으로 인해 마음속에 괴물을 만들곤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당시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게 너무 싫었으나 내 의견이 크게 반영되지 않아서 항상 짧게 잘라야 했고, 그게 마음에 너무 안 들어서 학교에 결석하고 매일 울었다. 모두가 나를 놀리고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스스로가 만들어 냈던 작은 괴물은 시간이 지나서 꽤나 커졌고, 성인이 되고 혼자서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지 못 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지금은 혼자서 밥도 잘 먹고, 영화도 잘 보러 다니고, 머리를 자르는 것에도 크게 감흥이 없을 정도로 익숙해져 있다. 뭐가 그렇게 어렵고 두려웠을까 되돌아본다면 결정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을 크게 만들었던 내 마음이 아니었을까. 혼자 밥을 먹으면서 나에게 욕을 했던 사람은 단 한 번도 없었고, 혼자 영화를 본다고 이상한 눈길을 보낸 사람도 없다. 나에게 욕하고 이상한 눈길을 보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였다.
상상력이 가지고 있는 힘은 무한하다. 그 힘으로 인해서 생각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마음속에 실체 없는 괴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바다를 거닐며 노을을 바라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