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에 묘사된 인간군상-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극을 읽거나 보는 것이 과연 '쓸모'가 있을까요?
여기서 '쓸모'란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지 여부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저는 잘 만들어진 비극을 깊이있게 접하는 것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거나 개인적 상황들에 현명하게 대처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저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YES!' 입니다. 사실 이 영화의 비극적인 결말이 주는 여운이 굉장히 컸습니다.
봉준호의 영화에는 완벽히 선한 사람도, 완전히 악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자 처지에서 나름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양한 각자가 만나고 뒤얽히며 예상치 못한 이벤트들이 발생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등장인물들이 아닌 현실적인 캐릭터들이기에 개연성이 확보되고, 그 결과 스토리나 전개에 대한 몰입도가 올라갑니다. 이런 장치들에 힘입어 다소 비현실적인 상황들도 현실성을 확보하게 되고 약간의 우연이라는 양념이 더해져 기상천외한 전개가 일어나죠. 봉준호 감독은 정말 이 시대의 독보적인 스토리텔러인 듯 합니다. 관객이 느끼고 생각할 여백을 남겨두어 '능동적' 감상이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번 작품 <기생충>은 그의 능력이 정말 정점에 달했던 작품 같습니다.
'인간군상'이라고 하면 좀 부정적인 표현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단어는 봉준호가 영화에서 그려내는 인간상에 가장 가까운 표현 같습니다. 본 리뷰에서는, 영화의 계급적 상징에 대한 기존의 많은 리뷰와는 좀 다르게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에 초점을 맞춰보려 합니다.
"서로에 대한 예의를 얘기하고 싶었다."
봉준호가 영화 개봉 전 한 얘기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어떤 의도로 이 말을 한 건지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영화는 가난한 가족과 부자 가족이 만나 벌어지는 일을 그려냅니다.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면 나와 다르다는 이질감에서 비롯되는 불편함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종교, 인종, 이데올로기, 언어가 다른 집단 간에 발생하는 갈등과 폭력의 근본적인 이유도, 이 다름에서 오는 불편함을 감내하거나 수용하지 못함이죠. 이런 불편함을 마주할 때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은 상대방을 labeling하여 한 범주로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차별과 혐오는, 낯선 존재를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 규정짓고 딱지를 붙일 때 발생합니다.
봉준호는 이 영화에서 빈자를 옹호하지도, 부자를 편들지도 않습니다. 봉준호의 인터뷰를 보면 알겠지만, 그가 거대담론을 얘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던 그의 말이 기억납니다. 봉준호는 의도해서 누군가를 계몽하려 들지 않지만, 관객은 영화를 보고 난 후 뭔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됩니다. 물론 각자가 조금씩 다른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봉준호는 피카소가 말했던 '예술작품'의 조건("예술작품은 보는 사람 안에서 존재한다") 을 충족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영화를 보고 떠올린 의미와 메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끼리 만날 때는 불편감이 들 수 있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다고 나와 다른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업신여겼을 때는 이런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 설령 그들이 듣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사적인 시공간에서도 그런 태도가 부지불식간에 전달될 수 있으니 항상 조심하자."
관련해서 떠오르는 여담입니다만, 인터넷은 행위자의 몸이 가장 private한 공간(예: 내 방)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적이지만, 네트워크 상에서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는 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사적인 몸이 공적인 말들을 쏟아낼 수 있는 곳이 인터넷인 거죠.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별 생각없이 내뱉는 말들이 인터넷으로 연결된 누군가에게는 큰 비수가 되어 꽂힐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진화론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150명 정도의 군집을 이루는 부족생활을 수백만년동안 해오다가 불과 만년 정도 전부터 더 큰 형태의 공동체인 도시, 국가를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는 여전히 150명 남짓한 지인들과 평생을 어우러져 살아가는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나에 대한 남들의 평판은 생존에 굉장히 큰 요인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뒷담화를 빨리 파악하고 본인의 행동을 수정하고 그런 노력이요. 이렇듯 여전히 원시적(?) 두뇌를 가진 인간이 인터넷 상에서 본인을 험담하는 내용을 접하면, 이성으로는 '이 사람은 어차피 나와 상관없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큰 상처와 모멸감이 촉발될 수 있습니다. 1명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큰 감정적 동요를 가져올 수 있는데 하물며 수천, 수만명이 그렇게 한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최근 들려온 안타까운 자살 소식이 떠오릅니다. 저는 박사장이 아내와 소파에 누워 냄새에 관한 얘기를 하는 장면을 보며, 인터넷 상에서 악플이라는 사적인 행동이 일으키는 폐혜가 떠올랐습니다. 박사장은 악의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려고 그런 말들을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결국엔 죽임을 당하게 되죠.
영화에서 기택이 살인까지 저지르는 비극을 촉발시킨 감정은, 업신여김 당함으로 촉발된 모멸감과, 이에 뒤이은 극단적인 분노였습니다.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킬 정도의 강한 감정이었죠. 기택은, 비록 겉으로는 허허실실 웃고 있지만 업신여김을 당할 때는 180도 돌변하여 욱하며 공격성을 표출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준 장면이 박사장네 거실에서 술파티를 하는 장면에서 충숙의 '바퀴벌레' 발언에 기택이 멱살을 잡는 장면이지요. 물론 서로 낄낄 웃으며 장난이라고 눙치고 넘어가지만, 기택이 그 때 '화난 연기'를 하며 장난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멱살을 잡았을 당시 그 감정은 분명 연기가 아니었죠. 기택이 막상 욱하며 멱살을 잡았는데, 정신차려보니 자식들도 다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점점 이성이 돌아와 장난을 쳤던 것처럼 연기를 했다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감독이 이 장면을 넣은 이유는 기택의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동에 개연성을 부여해주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택은 '빡치면 충동적으로 행동부터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죠. 기생충 OST 중에 '기택의 전두엽'이라는 곡이 있는데 저는 이 제목이 너무 재밌었어요. 전두엽에는 집행 기능(executive function)을 담당하는 영역이 있는데, 이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추론하거나 충동을 억제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기택네 집이 침수되고 다음날 박사장네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택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데, 그 와중에 기택의 전두엽 기능이 점점 마비되고 있지 않았나 싶어요. '우리는 지금 집이 물에 잠겼는데 늬들은 미세먼지 없어 좋다고 파티를 하냐.' 똑같은 폭우인데,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재앙이 되기도 하고 행운이 되기도 하는 각기 다른 계급적 운명을 대비시켜 보여준 명장면입니다. 그간 기택이 나름 노력하며 재기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쓰라림과 좌절이 생생히 되살아났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분노 감정이 점점 쌓이고, 기택의 전두엽이 그 감정을 조절하고 충동적 행동을 억제하는게 점점 어려워졌던 거죠. 그래서 '기택의 전두엽'이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합니다.
기택이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기 직전의 표정연기에도 정말 감탄했습니다. 기택이 찡그리고 있을 때는 아직 이성의 끈을 잡고 있었지만, 박사장이 코를 부여잡고 찡그리는 것을 본 기택의 표정이 스르르 하고 펴지고 멍한 무표정이 됩니다. 그러고는 저벅저벅. 마치 잡고 있는 이성의 끈을 놔버리는 것 같았죠. 전두엽의 억제 기능이 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영화를 지배하는, 또 다른 중요한 감정은 '무력감'입니다. "no plan."이라는 대사가 보여주듯, 개인의 계획과 노력만으로 사회적 성공과 행복을 가져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무력감은 '어차피 해도 안된다'는 것을 학습하며 의욕과 희망이 없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자본주의라는 제도의 '형식'만 놓고 봤을 때 소위 '노오력'하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전제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임은 우리가 일상과 뉴스를 통해 매일 확인하는 것이죠. 엔딩 장면은 무력감의 끝판왕입니다. "돈을 벌어 이 집을 살 테니 그 때 아버지는 올라오시기만 하면 되요"라뇨. 기우가 그 돈을 모으려면 족히 100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기우가 한 때 과외를 하는 학생과의 애정관계를 통해 신분상승이라는 백일몽에 빠지지만 이는 현실에서 일어나기엔 너무도 희박한 희망사항이었습니다. 영화 후반부 기우는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과 신분상승이라는 희망사항 간의 거대한 괴리를 직면하지 못하고, 현실을 부인(denial)하거나 회피하려 듭니다. 본인이 바랬던 판타지를 어떻게든 현실로 만들려고 무리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그 돌을 집어들고 지하실로 내려갔다가 큰 봉변을 당하게 되죠. 기우는 그 때 단기 정신증적 상태(micro-psychotic state)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홍수가 난 기우의 집에서 돌이 떠오르는 장면도 기우에게 나타난 일종의 환각이었던 거죠. 조현병과 같이 현실검증(reality-testing) 능력이 심각하게 손상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시적으로 저하된 상태였던 겁니다. '이 행운의 돌이라면 살인을 저질러도 큰 문제가 없을거야'라고 믿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내리는 선택으로 인해, 본인도 크게 다치고 뒤이어 일어날 더 커다란 비극에 단초를 제공하게 되죠. 현실 부정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처참하게 보여줍니다.
자, 그럼 이제 다시 글의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마음 건강을 위해서라도 저는 <기생충>과 같은 잘 만들어진 비극을 가끔 접하길 권하고 싶습니다. 단, 심리적/정신과적 문제 혹은 과거 트라우마로 인해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을 볼 때 감정적으로 압도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요.
참, 헤피엔딩 일변도의 상업 영화에 익숙하여 영화를 오락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관객은 이런 영화가 많이 불편하고 찜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 강신주가 강연에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헐리우드 영화 말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를 보라구요. 불편함이 일어나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안에 보기 싫은 부분이 자극되거나 현실을 직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지만 마주하기 싫은 것들이요. 위에서 말했던 무력감, 모멸감, 죄책감, 분노 같은 감정일 수도 있구요. 그런 감정들이 내게는 없다고 착각할 때, 문제가 발생됩니다. 영화에서 기택이, 기우가 그랬던 것처럼요. 있음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비극적 상황에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라는 책에서는 비극과 사건사고를 다루는 뉴스의 차이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비극의 구조는 등장인물에게 충분히 공감하고 동일시할 수 있게 하는 구조를 띕니다. 우리가 기생충을 보며 기택네 가족에 동일시했던 것 처럼요. 따라서 보고 재밌게 즐기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본인의 삶에도 적용하고 좀 더 조심할 수 있게 만듭니다. '반면교사' 삼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뉴스에는 비극에서처럼 당사자들에게 동일시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장치가 없습니다. 실제로 극 중 후반부에 등장하는 JTBC 보도 장면도 이런 루트를 그대로 답습합니다. '정체불명의 노숙인이 갑자기 나타나 묻지마 살인을 저질렀고 한명은 증발했다.', '대낮의 칼부림'. 개개인의 역사와 네러티브는 말끔히 지워지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요소들만 남습니다. 뉴스는 그렇게 끊임없이 소비되고 일상의 불안감만 키웁니다. 그 점에서 저는 사건사고 뉴스 100개를 읽는 것보다 짧은 단편소설 한편을 읽는 편이 삶에 훨씬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로 인해 자극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나눠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