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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나 Feb 03. 2021

애니메이션 <소울>; 현재를 사는 기술

현재는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이다

※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그놈의 멘토, 멘토, 멘토.

백문이불여일견 이란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견(見)'은 '보다'는 뜻이지만, '실제로 경험해본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코끼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코끼리의 생김새에 대해 100번을 상세히 설명해준들, 직접 1번 볼 때 만큼의 감흥은 없을 겁니다. 100번의 '설명'은 오히려 온갖 추측과 상상을 부추겨 코끼리를 실상과는 전혀 동떨어지게 인식하도록 할 확률이 큽니다. 극중의 22호를 보며 이 '백문이불여일견'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제리(태어나기 전 세상의 관리자들)들은 22호를 탄생시키기 위해 인류 역사상 훌륭한 위인들을 멘토로 붙여줘 삶의 의미라는 마지막 불꽃을 채워주려 노력해왔지만 그 불꽃은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멘토들이 남긴 비난의 말들이 22호 스스로를 옭아매게 하고 삐뚤어지게 만드는 장애물로 작용하죠. 그래서 22호는 마치 '죽어도 태어나기 싫어하는' 골칫덩어리로 비칩니다.

'이렇게 해봐', '너한텐 이게 맞아', '인생은 OO해야지'

이른바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 세트는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언제나 스스로 느끼고 경험하고 깨닫는 과정에서 비롯됩니다. 이 영화는 이 진리를 아름답고 간결한 이야기로 그려냅니다.


#2 단풍나무 씨앗.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은 강력한 메타포.

단풍나무 씨앗에 그만 울어버렸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꼽은 최고의 장면은 주인공 '조'가 무아지경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며 22호을 찾아가서 단풍나무 씨앗을 전해주는 순간이었습니다.

22호가 조의 몸에 들어가 경험한 것들은 특별하거나 거창한 게 아닙니다. 맛보고, 만지고, 듣고, 보고, 느끼고..  조의 몸을 빌려 오감을 통해 경험하는 것들이 22호에겐 삶의 의미가 됩니다. 수억년동안 찾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몸'의 경험을 통해 찾습니다. 마더 테레사도, 링컨도, 코페르니쿠스도, 칼 융도 찾아주지 못한 마지막 불꽃을 22호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찾습니다. 급기야 조의 몸을 되돌려주기 싫어 도망칠 정도로 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런 22호를 보며, 조는 의아해하지만, 곧 깨닫게 됩니다. 본인이 그토록 원했던 목표(재즈 아티스트로 공연하는 것)를 이룬 후에야 말이죠.

조가 그토록 원하고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유명 아티스트와의 공연을 마친 직후 조는 허무에 빠집니다. 이게 다야? 목적이 달성되면 엄청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그닥 그런 것도 아니네? 당황하고 허탈해 합니다. (여기서 이미 저는 어깨가 들썩이고 눈물이 차올랐어요. 조로 대변되는 우리들의 맹목적인 '목적지향적'인 삶의 모습에 연민을 느껴서였을까요.)

우리도 이런 '목적지향적 삶' 만이 의미있고 가치있다는 태도를 어릴 때부터 은근히 주입받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즈음부터 지겹도록 듣는 말 '커서 뭐 되고 싶어?'라는 질문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질문을 지속해서 받으면 '아, 커서 뭔가가 되어야 하는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소울>에 감탄했던 지점은 기존에 무한정 반복되어 온 '자아실현'의 공식을 보란 듯 깨부수어 줬다는 거에요. '조가 정규직의 안정적인 직장(교사)을 버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아티스트의 삶을 용기있게 택해서 행복하게 살았다' 이런 진부한 틀을 아주 신선하게 전복해 버립니다. 영화는 넌지시 묻습니다. 정규직 삶이든, 위대한 아티스트의 삶이든, 결국엔 맹목적으로 목적만 바라보고 현재가 없다는 점에서는 결국 같은 거 아닌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은행나무 씨앗이 은유하는 것은 현재의 소중한 일상입니다. 햇살의 따듯함, 바람결, 음식을 맛보는 순간 같이 매일같이 마주하는 소소한 것들이죠. 목적만 바라보고 달려갈 경우, 지금 여기의 현재는 일종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음식을 먹어야 힘을 내서 일을 할 수 있고, 잠을 푹 자야 내일 있을 발표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고.. 현재는 항상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영화는 묻습니다. 매 순간 '나중의 무언가'를 위해 현재를 놓쳐버린다면, 결국 삶 전체를 놓치고 있는 것 아닌가? 라고요.


#3  조가 22호에게 jazz를 배우다

조가 그토록 좋아한다고 믿었던 Jazz였지만, 조의 실제 삶의 매 순간은 'Jazzing'하지 못하며 살았던 겁니다. (Jazz는 '즉흥성'을 의미합니다. 즉 기존의 틀이나 관념, 습성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 변주되는 유연함입니다. 이는 현재 경험에 온전히 마음을 열고 경험할 때 가능해지는 상태입니다.) 

22호가 처음 경험하는 것들(먹기, 보기, 듣기 등 오감의 경험)에 호기심과 경이로움으로 반응하는 걸 보고, 조도 그 감각을 되찾게 됩니다. 아, 맞다. 저게 jazz였지. 목적만 바라보고 현재를 놓지는 건 jazz가 아니지.

자신에게 큰 깨달음을 선물한 22호에게 감사해서였을까요. 조는 22호를 찾아가 은행나무 씨앗을 건네고, 지구통행증 마저도 건넵니다. 은행나무 씨앗을 받아든 22호는 자신을 스스로 옭아매는 생각들(시커멋게 표현된 괴물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돼죠. 조는 자기의 생명을 포기해서라도 22호가 태어나서 살아가도록 하고 싶습니다.  제리는 그런 조의 선함에 감화되어 조에게 한번 더 살아갈 기회를 주죠. 이 부분도 물론 감동적인 포인트지만, 더 큰 감동은 22호와 조가 서로에게 자극받으며 스스로를 옭아매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었어요.


#4 이야기가 가진 힘

사실은 '현재를 살라'라는 메세지 자체는 새로울 게 없습니다. 카르페 디엠, 소확행, 욜로족, 마음챙김 명상... 이미 닳고 닳도록 들어 진부해지기까지 한 메세지죠. 그런데 그런 메세지도 '~~해야 한다', '~~하면 좋다'라는 설득, 조언의 형태를 띄면 희한하게도 그 힘을 잃어버려요.

<소울>은 그 메시지를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죠. 2명의 주인공의 입장에 이입하게 만들고, 느끼게 하죠. '현재 경험을 즐기며 사세요'라는 대사는 결코 나오지 않지만,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에 몰입하고 나면 왠지 그러고 싶어 집니다. 그게 이야기가 가진 힘이 아닐까 싶어요. 좋은 이야기의 힘은 이토록 셉니다.


저는 일단은 오늘 마주한 저녁밥부터 현재에 충분히 머무르며 즐겨볼까 합니다. 22호가 조의 몸에 들어가 피자를 처음 먹던 그 표정을 떠올리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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