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꿈
라스베이거스 하면 떠오르는 분위기가 있다.
쓸쓸함, 고독, 휑한 눈, 패배자, 길 위의 여자들.
유혹을 넘어 멱살을 잡아 끄는 네온사인.
낮보다 밝은 밤거리를 걷다 보면 신기루가 따로 없다.
끈적끈적했던 영화 리빙 라스베이거스(Leaving Las Vegas 1995)가
다큐처럼 보이는 곳이다.
8년 만에 라스베이거스를 방문했다.
이번으로 네 번째 방문이다.
사막 위 도시는 많은 게 변해 있었다.
신의 저주를 받고 금방이라도 쓸어질 것 같았던
호텔들은 부흥을 하고 있었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밟게 되는 눅눅한 카펫
귀를 울리는 슬럿머쉰 소음
담배에 오염된 공기
눈 부신 실내의 조명등
이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았다.
카펫을 걷어 낸 호텔 로비가 생소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묵은 호텔은 도박 기계가 없었다.
비행기 밖으로만 나와도 슬롯머신이 반겨주는 도시인데
도박을 못 한단다.
물론 비즈니스호텔을 찾아 예약을 하긴 했지만
라스베이거스에 이런 호텔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로비의 모습은 차분하기만 했다.
누가 봐도 출장 온 모양새의 사람들.
드문드문 보이는 가족 여행객.
텅 빈 야외 수영장.
라스베이거스에서 평온을 찾은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평온을 피해 거리로 나섰다.
뜨거운 열기가 사막 위의 도시임을 상기시킨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불빛들
라스베이거스의 거리는 8년 전 보다 더 길어져 있었고,
못 보던 호텔이 들어서 있었고
대규모의 호텔 공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 도시가 유지되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호기심은 입을 열게 한다.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물었다.
호텔리어, 택시 기사, 웨이터들에게 질문을 했다.
이 도시의 힘은? 꿈이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많은 사람을 만난 건 아니었지만 모두가 타지에서 일거리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도박으로 한탕을 벌자는 생각 따위는 없는 사람들.
라스베이거스는 다른 이유에서 그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건실하게 Sin City를 버티게 해주는 사람들이었다.
이 도시는 더 이상 도박으로 유지되는 도시가 아니었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가족 휴양지의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 뒷골목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느낀 건 라스베이거스에서의 고요함이었다.
도박의 도시에 와서 도박장을 피해 다닌다는 게 아이러니지만,
도박장만 피하면 충분히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도박을 안 하고도 즐길 수 있는 도시가 이미 됐다.
세계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는 식당이 호텔마다 있다.
호텔의 음식 값은 여전히 비쌌지만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가성비 좋은 맛집들도 즐비했다.
서비스의 도시답게 종업원들은 밝은 모습에 매너들도 좋다.
이 도시의 살림꾼들에게 이 도시의 힘에 대해 물었다.
컨벤션 때문이라는 현실적인 대답을 대부분 했다.
1년 내내 쉴 새 없이 열리는 최고 최대 규모의 컨벤션이 사람들을 모이게 한단다.
크고 작은 행사를 합치면 1년에 2만 개 정도의 행사가 열린다.
도박의 도시가 미식가를 유혹하고 쇼핑, 공연, 스포츠 행사 개최 등으로 거듭나고 있다.
작년에는 라스베이거스 대로에서 자동차 레이스 F1 그랑프리가 열렸으니 할 말
다했다.
이 도시는 2030년까지 메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한다.
세계 엔터테인먼트 및 스포츠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각자의 꿈은 달라도 모두가 꿈을 좇고 있었다.
이러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장을 못 보는 거 아닌가?
이 도시의 경제 상황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라,
오랜만에 방문한 환락의 도시가 너무 변해 놀라서 하는 이야기다.
늦은 밤거리도 마음 편히 걸을 수 있었다.
저 혼자 뭔가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사람들이 눈에 띄긴 했지만
그건 그 사람들 사정이고 거리에서 시비를 걸거나 지나친
호객행위 같은 건 없었다.
치안도 믿을만했다.
자전거를 탄 경찰들이 곳곳에서 순찰을 하고 있었다.
왠지 필요할 때 와 줄 것 같은 느낌 같은 느낌.
원래 도박 같은데 관심이 없다.
이번에 라스베이거스를 가게 된 건 어디를 좀 가고 싶은데
어디를 갈지 모르다가 그냥 찾게 된 장소다.
추억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던 도시.
이번 여행으로 끈적끈적하게 붙어있던
영화 리빙 라스베이거스(Leaving Las Vegas)의 자국이 조금은 옅어진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O4HrGa2-RLc
한탕주의가 아니고
패배자의 얼굴이 아니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젊은 얼굴들이 좋았다.
그들에게서 배운 게 있어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