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원 작가의 작품 세계
내 브런치의 글 <여보, 나 식당 차릴래>에서 자주 언급된 'A'는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화가이다. 나는 피카소나 클림트, 달리 같은 미술사에 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솔직히... 잘 모른다.
하지만 내 친구 'A'가 화가이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건 잘 안다. 미술에 완전 문외한인 내가 그의 작품을 보고 느낀 걸 적게 되는 이 공간을 통해 조금 더 그에 대해 알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A'의 이름은 황규원이다. 힘든 청춘을 보낸 그의 화풍은 내가 느끼기엔 안락함이나 희망보다는 평온함과 암울함 그 사이 어디쯤이다. 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작품을 통해 무엇을 표현 하는 사람은 그것이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본인 인생의 일부분이 녹아들어 있다고 여기기에 그 역시 작품에 본인의 심상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스며들어 있다고 여겨진다.
오늘 처음 맞이할 그의 작품은 바로 "three people" 이다.
우선 그의 코멘트를 보자.
물가에 서있는 나 자신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그 유골을 바다에 뿌리려는 시도 중에
물에 비친 나를 보았다.
물 표면을 따라 흐르는 나의 그림자는
하나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계속 변하고 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 그 상황에 따라 바뀌는 물의 양태는
지금까지의 나의 복잡 다단한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내가 존재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 있는 것인가?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나는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물에 비추어진 나의 그림자는 화면 밖에 있는 나 자신을 설명한다.
물은 그만의 존재 방식에 따라 나를 흩트려 놓았다가 다시 제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가벼웠다가 무거워지는 이 느낌은 존재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는 그 장면을 유화를 이용해 그려 보았다.
무엇을 의도했든 작가는 작가의 의도가 있고 그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에게는 그만의 기준으로 보게 된다. 작가와 감상하는 사람간에 비슷한 정서의 교감이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사람의 캐릭터는 제각각 다르듯이 해석에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그림을 보게 되는 매력이 아닐까 한다.
나는 규원이의 다른 여러 작품들도 봐왔기에 그만의 화풍이 느껴진다. 무채색, 잿빛의 색감, 과거 거울을 활용한 작품들속에서 뒷모습만 기억에 남을 뿐 실체로서의 얼굴을 표현한 그림은 본 적이 없었다. 위 작품에서도 물에 비친 모습이지만 얼굴 쪽 부분은 돌을 던져 파장이 일어난 물 웅덩이 마냥 더 왜곡되어 있다.
사람의 신체 중 얼굴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제일 처음 마주하는 곳이지 않을까. 본질적으로 '나' 스스로에 대해 침잠해 있는 동안 작가는 의도적으로 외부와의 단절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사실 이 녀석, 내가 주기적으로 생사여부를 확인할 정도로 혼자 뭘 그리 하는지 그만의 시간을 많이 가진다. 나는 그에게 많은 걸 바라진 않는다. 그림 많이 팔아서 나한테 소주 한잔 사줄 날을 기다리며...
[그림설명서]는 규원이 작품이 업데이트 될 때마다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