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의 데이트

by 김주원

별다른 계획이 없었던 주말이었습니다. 아내는 친구들과의 점심 식사 모임이 있어 아침 일찍 부산 해운대로 떠났습니다. 저는 모처럼 아침 8시 넘어까지 잠을 잤습니다.


평소 통영 연화도에 지내시는 장인어른은 저희 아이들이 보고 싶어 몇 주간 저희와 같이 지내셨는데요. 불현듯 통영에 가보셔야겠다고 하셔서 일어나자마자 장인어른을 창원버스터미널에 모셔다 드리고 집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아침과 점심 사이의 어중간한 시간이었는데요. 아이 둘을 데리고 일단은 밖으로 나왔습니다. 첫째인 아들 녀석이 태권도 1품 심사를 앞두고 있어서 주말인데도 태권도 도장에 연습하러 보내고 나니 저와 둘째인 딸아이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처럼 부녀지간 둘이서 손을 꼭 잡고 동네를 걸었습니다. 우리 동네는 크고 작은 공원이 곳곳에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동네 자체가 촌구석이긴 해도 산책하기 좋은 곳입니다. 어느 공원 놀이터에 이르러 딸과 저는 술래잡기 놀이를 했습니다. 당연히 딸이 술래였을 때 저는 절대 안 잡혀주었습니다. 저는 그런 놈입니다.


숨이 차서 둘이서 벤치에 앉아 있는데 어떤 꼬마 애가 킥보드를 타고 오더니 초코송이 과자 하나를 제 딸 손에 쥐어주고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떠나갔습니다. 초코송이에 무슨 독약이 발라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빠라면 당연히 신경 쓰일법한 생각을 잠시 하는 동안 딸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입에 집어넣더군요.


같은 아파트에 살며 알고 지내는 한 가족이 우리 근처를 지나가면서 저와 딸아이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저 혼자 애들 데리고 다니는 걸 보며 옆에 있던 남편에게 좀 보고 배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정작 저는 그런 말 하지 마라며 무덤덤하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먼저 친구 만나러 갔다면 와이프가 애들 데리고 나왔을 거라고요.


저희는 그렇습니다. 아내가 음식을 하면 제가 설거지를 하고 제가 요리를 하면 아내가 설거지를 하는 뭐 그런 불문율을 갖고 있는 거죠. 아내가 친구 만나러 가면 제가 아이들을 보는 거고, 제가 친구를 만나러 가면 아내가 아이들을 보는 거고요. 아이들을 봐주시는 분들이 계시면 그제야 비로소 둘이서 영화나 한 편 보던지 근처 투다리에서 맥주 한 잔 걸치는 정도입니다.


공원에서 이래저래 질리도록 놀다 보니 딸아이가 조금 심심해하더군요. 갑자기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길래 타고나기를 스토리텔링에 젬병으로 태어난 저로서는 책을 읽어주는 게 더 낫겠다 싶어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어린이 열람실에 들어가 조용히 신발장 한 칸에 제 신발이랑 딸아이 신발을 포개어 놓고 무서울법한 그림책을 하나 골랐습니다. 그러고서 푹신한 쿠션이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 책을 속삭이듯 읽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어린이 열람실이라 적당한 소음에 편승해 속삭이듯 읽어줬는데요. 딸아이가 무서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길래 나름 연기도 해가며 읽어줬습니다.


다시 첫째 아이가 태권도 연습을 마칠 때가 되어 조용히 도서관을 빠져나왔습니다. 둘째는 뭐가 그리도 신이 났는지 계속 옆에서 재잘재잘 거리더군요. 이래서 다들 딸바보가 되나 봅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미칠뻔했습니다. 물론 제 눈에 안경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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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도장 입구 옆에 숨어서 첫째 녀석이 나올 때 놀래켜주는 걸 끝으로 해지기 전 하루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집에 와서 아이들을 씻기고 나니 친구들을 만나러 갔던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하루종일 걷다 보니 저는 잠시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뻗어버렸습니다. 아이들이 소파 위로 점프를 하며 제 배를 밟고 지나갔지만 맞받아쳐줄 힘이 남아있지 않아서 저는 그냥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다음엔 아이들과 걸어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시험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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