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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FT explorer 허마일 Feb 15. 2020

나는 토종 호빗이 아니었다.

우리는 누구나 영웅담을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 한반도를 단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부터 서른넷이 된 지금까지 비행기를 탄 경험은 딱 두 번인데, 첫 번째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를 향해 날았고, 두 번째는 그때 헤어져 10년 동안 얼굴은커녕 연락도 하지 못한 아빠를 만나기 위해 날아간… 또 제주도였다.


 젊은 날의 여행은 빚을 내서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것이라는데 나는 왜 세상을 향한 여행 다운 여행을 가지 못했을까? 아니 안 갔을까.‘아, 여행 그 피곤한 짓을 왜? 시간 낭비, 돈 낭비’ 같은 의심들은 마음 깊이 박힌 방어기제였을지 모른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그 해 가을, 우리 집은 파산했다. 언제부터인가 인생 한 방에 집착하기 시작한 아빠의 과도한 주식투자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자연스러웠던 걸까?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님의 이혼으로 나는 얼떨결에 가장이 되었다. 아바마마는 짊어지었던 무거운 왕좌, 그것보다 더 무거운 빚을 나에게 물려주고 이제는 가벼운 새우를 잡는 어부가 되겠다며 바다로 떠났다.

 '오 부디 고래 만한 새우를 잡아와서 다시 왕위에 오르시옵소서.' 그렇게 빌었건만…

 바다 위에서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고 결국 집으로 돌아왔던 집념의 오디세우스와 달리, ‘새우… 어디 있시유? 어디서 오슈?’ 충청도 공주(바다 말고 육지) 순수 혈통인 그는 새우를 잡지 못했다.

아빠는 육 개월 후, 제주도민이 되었다. 그렇게 십 년 후 나는 다시 그 작은 섬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내 청춘 두 번의 비행 전부와 아빠를 빼앗아간 섬. 재주는 좋지만 재수는 오지게 없는 섬.

고등학교 졸업 후

배낭여행, 워킹홀리데이, 어학연수 같은 해외로 진출하는 친구들이 유난히 거슬리고 부러웠다.

지금도 물론 인생영화, <반지의 제왕>에 당시 한참 빠져있었는데,

친구들의 객기와 패기 넘치는 여행담을 듣고 있으면,

나는 평화로운 샤이어에서 밭을 갈구며 살면서 모험을 마치고 귀환한 영웅들을 환호하고 동경하는 토종 호빗이 된 것만 같았다. 나도 간달프도 잘 따르고, 드워프도 사귀고 특히 그 금발의 엘프들이랑… 누구보다 잘 놀 수 있는데 말이야. 영화와 인생이 다르듯 해외여행은 나에게 현실이 아닌 스크린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판타지였다.


 수학여행 그 뒤로 나는 정말 돈에 수학적인 사람이 되었다. 지갑에, 통장에 얼마가 있어야 하는지 계산기를 두들길 수밖에 없는 환경. 빚져도 온갖 가치와 의미로 빛이 난다는 젊은 날의 여행을 하기엔, 이미 쌓인 빚이 그 빛을 가리기 충분한 높이였으니… 정수리에서 부터 짓누르는 먹고사니즘의 압박에 내 키도 그때 멈췄다. 진짜 호빗이라니. 젠장할!


 해외로의 진출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행을 동경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더 그것은 더 판타지스러워졌으며 그래서인지 현실과 판타지를 더 또렷이 구분하고 분리해 따로 격리시킨 마음이 문제였다. 언젠간 반드시 판타지 모험 무비에 출연하리라 마음만 먹고는 이때까지 촬영을 미뤄왔던 격이다.

 그랬던 내가 돌아오는 봄에 드디어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다. 낭만이 넘치는 아름다운 해변! 걱정과 근심 없는 파라다이스! 바로 세부 항공편을 지른 것이다. 물론 오크족에 맞서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떠나는 위험한 모험은 아니지만 어마 무시한 고래상어와의 대면, 후들거리는 계곡 절벽 다이빙! 그리고 물속에서 오크보다는 귀엽게 생긴 물고기들과 벌이는 호핑투어까지… 나름 액션을 갖춘 여행이 될 것이다.


 수많은 해외 여행지들 중 휴양지를 택한 것은 물론 거리와 경비도 따졌지만 쉬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의 삶을 살면서 이렇다 할 큰 성과는 없었지만 마음만큼은 이래서 불안 저래서 불안, 맹렬히 치여왔기에 그랬나 보다. 따지고 보면 생애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실현 가능하게 된 것도 그놈의 퇴사 덕분이다.

 회사를 나와서 부딪히게 된 넓은 세상은 모험 그 자체였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겪었다. 위기와 기쁨의 골목골목에서 스쳐 지나간 도움의 손길들, 여전히 함께 하는 고마운 동료들, 나만 바라보는 할머니들, 꿈에 그리던 여자 친구, 예상치 못한 다양한 강의와 강연 기회들을 얻었다. 유튜브, 트로트 경연, 독서모임지기 등 예전의 나로선 상상 못 했을 일들에 도전했다. 역시나 하는 족족 망했지만 큰 변화를 겪었고 여전히 나의 여정은 지금도 ing인데, 이게 가만 보니 <반지의 제왕>과 같은 모험 영화의 플롯을 갖추고 있단 말이지!


모험의 시작 - 동료들과의 만남 - 도전과 위기 - 죽을 고비(실망과 좌절)- 뜻밖에 기회 - 결국 성공 or 결국 실패 - 엔딩 - 다시 모험의 시작 = 돌고 도는 인생


 영화나 인생이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도 이 플롯의 전개 안에서 이루어지는 흐름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눈물 나게 쓰디쓴 실패의 결말이 있지만 3시간짜리 영화에 축약된 한 번의 사이클을, 인생에서는 수없이 되풀이할 수 있다는 것은 참 희망적이다. 물론 주인공의 피나는 노력과 성장이 엄숙한 bgm 위에 깔리는 몇 번의 컷으로 퉁치는 것은 지지부진한 현실에 입장에선 너무나 부럽다… 감독님, 대체 언제까지 죽을 고비여야 한단 말이오.


 판타지로만 여기었던 영웅의 여정이 내 삶에도 자리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뿌듯하지만, 여전히 해외여행은 판타지스러운 나이기에 달콤한 끝장을 봐야 한다. 프리랜서의 고군분투기보다는 달콤 짜릿한 세부 여행기가 어린 시절 부러웠던 친구들과, 그 재수 오지게 없는 제주도한테 핵사이다급 펀치가 될 것이야. 으흐흐.

 이제 나는 생애 세 번째 비행을 앞두고 있다. 설렘과 기대로 터져버려 집 나간 정신 이미 하늘을 날고 있지만 침착하자. 세부 여행이 순탄하기만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분명 또 삐그덕 걸그적 거리겠지. 그 예상밖에 일들에 나는 또 떨고 뛰고 할 테지만 삶은 예측 불허한 여행이고 영화인 것을… 그 속에서 영웅담이 생긴다는 걸 인정하고 마음껏 만끽하자.


반지에 사로잡혀 탐욕의 끝을 보여주는 골룸이 되어야지. 쾌적한 리조트에서 팬티만 입고 닥치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자야겠다.

삶의 굴레와 속박에 젖은 셔츠를 풀어헤치며 외쳐야지.‘마이 프리 샤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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