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으로 10억짜리 집을 사는 나라

내 급여로 살 수 있는 집값 계산 프로그램 첨부.

며칠 전, 친구와 저녁을 먹다가 이런 얘기를 들었다.
"1억 8천만 원만 있으면 10억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대. 정부가 같이 사주는 구조래."

순간, 낯설지 않은 기시감이 밀려왔다. 이런 얘기, 예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정확히는 2013년,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다. 경제부총리가 빚내서 집을 사라면서 ‘공유형 모기지’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주택을 공동 구매하고 지분을 나눠 갖는 구조를 이야기했었다. 그 정책은 결국 흐지부지 끝났지만, 10년이 지나 그와 닮은 방식이 ‘지분형 모기지’라는 새 간판을 달고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분위기가 다르다.
그때는 집값이 떨어지는 와중이었고, 지금은 정부가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다.
“1억만 있어도 10억짜리 집을 살 수 있습니다.”
정부가 함께 투자해주고, 손해까지 감당하겠다는 메시지다. 그야말로 국가가 앞장서서 '집 사세요'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매력적이다. 실제로도 구조는 가능하다.
1억 8천만 원의 자기자본에 은행 대출 5억 원, 그리고 주택금융공사의 후순위 투자 3억 2천만 원이 더해져 10억 원짜리 집을 살 수 있다. 내 돈으로는 못 살 집을 정부가 도와줘서 사게 해주겠다는 거다. 이익이 나면 정부와 나눠 갖고, 손해가 나도 정부가 떠안는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런 제도가 모두에게 만연해졌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처음엔 몇몇에게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모두의 기회'가 되는 순간, 시장은 다른 방향으로 반응한다.
수요가 늘고 경쟁이 붙으며, 당연히 가격은 오른다.
정부가 ‘1억으로 10억 집을 살 수 있다’고 광고하는 순간, 1억 8천을 가진 사람은 전국적으로 셀 수 없이 많아진다. 이들이 일제히 집을 사려고 하면, 기존 7억 하던 집이 10억이 되고, 10억 하던 집은 13억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집값이 폭등하면 좋을 사람은 정해져 있다. 기존 주택 보유자, 특히 여러 채 가진 이들이다. 거주용 집 한 채인 사람은 그 집을 팔아서 이동할 집도 그 가격이기 때문에 집 값이 얼마가 되든지 팔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잃는 쪽은 누구일까?

소득은 늘지 않았는데, 주거비용 때문에 더 큰 빚으로 집을 사야만 하는 서민들이다. 지금과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 유예가 될 뿐이다. 소득이 늘지 않으면, 이자를 갚지 못해서 빚으로 오른 집 값은 결국 떨어진다.

결국은 집 값 하락에 의한 ‘정부의 손해'를 감당해야 하는 국민이다. 정부가 책임진다고 했지만, 정부는 자기 돈이 없다. 세금으로 메울 수밖에 없다. 신규 진입자들은 그들의 손해를 함께 메워주는 ‘투자 파트너’가 될 뿐이다.


이 지점에서 이 정책은 '공유지의 비극'으로 치닫는다. 처음엔 기회로 포장됐지만, 결국은 모두가 망치는 시스템이 된다. 모두가 집을 사겠다고 몰리면, 집은 기회가 아니라 고통이 된다. 그리고 집을 사지 못한 이들은 집 값 상승으로 월세, 전세 등의 거주비용도 증가합니다.


이 정책이 더 고약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책의 실효성보다 감정 자극에 집중하는 정치적 시그널.
실제로 지분형 모기지는 아직 구체적 실현 단계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부는 벌써부터 '당신도 자산가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뿌리고 있다. 그 꿈은 달콤하다. 그래서 위험하다.

사실 우리는 이런 구조를 여러 번 봐왔다.언제나 자산 가격을 끌어올릴 땐 '주거 안정, 자산 형성, 청년 지원'이라는 좋은 핑계가 등장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늘 가격 상승이 있었고, 나중엔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손해는 늘 국민이 나눠가졌다.


이제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정말 1억을 가지고 10억짜리 집을 사는 것이 부자가 되는 길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빚을 진 자산은 자산이 아니라 리스크고, 부자란 자산이 아니라 소득으로 증명되는 존재다.
지금 정부는 그 리스크를 국민에게 쥐어주고, 그걸 ‘기회’라 부르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1억 가진 사람이 10억짜리 집을 사는 것은 아직 구체화되지도 않은 계획일 뿐이다.
하지만 선거를 앞둔 정부는 그 계획을 확정된 미래처럼 광고하며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 그리고 그것을 기회라 믿는 유권자들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경제는 기대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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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집을 사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할 때, 그걸 '정책'이라 부르고 박수치는 순간, 우리는 또 한 번 혈세로 떠받친 거품의 사이클로 들어가게 된다.

국민 모두가 경제 천재, 투자 천재가 되어야만 살아남는 나라는 지옥이다.
돈이 모든 결정의 당위성을 만들어내고, 경쟁이 기본값이 되는 사회는 지옥 그 자체다.

나는 그런 나라를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24시간 중 10시간을 일하고, 잠도 부족하고, 끼니도 대충 때우며, 겨우 10인치 화면 속 유튜브로 하루의 유일한 위로를 삼는 삶 속에서 '10억짜리 집을 목표로 삼아라'고 가르치는 것만큼 잔인한 교육이 또 있을까?


이제 겨우, 정말 겨우 지나온 절망의 구조를 바꿔볼 기회가 왔다.
그런데 여전히, ‘10억짜리 집을 사야 성공’이라는 환상을 퍼뜨리는 이들에게 표를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너무도 두렵다.


우리는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니라, 달디단 청산가리를 권유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엔, 그냥 넘겨서는 안 될 것 같다.


- 내 급여로 살 수 있는 집은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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