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언제 와?”라는 동생의 물음에 “오늘 오시면 좋겠다.”라고 나는 답했다. 깊은 산골에서 동생과 나는 늘 엄마를 기다렸다.
아빠가 공직에 입문하고 우리 가족은 조부모님과 사는 두메산골에서 시내로 분가를 했다. 집안 형편으로 5남매를 모두 데려가지 못하고 6살 나와 4살 내 동생은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할머니는 우리를 많이 아껴주셨지만 엄마가 늘 그리웠다. 동생과 나는 엄마가 늘 오시는 길로 나가 우두커니 한참을 기다리곤 했다. 어떤 날은 더 멀리 또 더 멀리 나가곤 하였다. 기다리면 엄마가 올 것 같았다.
그렇게 기다리다 엄마가 오는 날은 엄마에게 달려간다. 그러면 엄마는 우리 둘을 안아주었다. 그리고, 과자를 내어 주시며 “할머님 말씀 잘 듣고 잘 있었니?” 하고 물으신다. 우리는 웃으며 “응”하고 대답한다.
엄마는 조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러 오셨다. 엄마가 논·밭에서 농사일을 하실 때 우리는 일하시는 엄마 곁에서 놀았다.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오늘은 엄마가 우리를 데려갈 거야.”라는 생각으로...
점심을 같이 먹고, 해가 저 산으로 넘어갈 즈음 엄마는 세수를 하시며 돌아갈 채비를 하신다. 그때부터 동생과 나는 우울해진다. 금방 울음보가 터질 것 같다.
엄마가 채비를 하고 나서면 우리도 엄마를 따라간다. 한참을 가다 엄마는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시며 “내일 또 올게” 하고 성큼성큼 가신다. 키가 큰 엄마의 발걸음은 빨랐다. 엄마가 눈에 사라지면 동생과 나는 “엄마”하고 울었다.
아들 둘을 그곳에 두고 가시는 엄마의 마음과 엄마를 따라가려는 동생과 나의 그 마음이 산으로 퍼지고 들로 퍼졌다. 안타까움으로...
엄마를 보내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면 늘 할머니가 우시며 우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지금도 이따금씩 찾는 엄마와 늘 이별을 했던 두메산골의 그 산등성은 그때 우리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국민학교 갈 때 엄마랑 같이 살자. 그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지?” 그리고, 엄마는 그 약속을 지키셨다.
병석에 누워계신 엄마를 보며, 두메산골에서 동생과 같이 엄마를 기다리고, 엄마와 헤어지는 그 안타까운 시간들을 떠올린다. 엄마가 우리를 보기 위해 두메산골로 오실 때 그 설렘과 우리를 그곳에 두고 가실 때 그 아득함을 떠올린다.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가셨던 엄마의 마음은 나와 내 동생의 마음보다 많이 아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