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과 깨우침의 간극
나는 싱가포르에서 첫 직장을 다녔다. 창업해서 회사를 꾸렸던 적을 제외하면 대학교 졸업 이후 첫 직장이었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회사를 운영해야 했던 창업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니 좋은 선배를 만난다는 설렘이 있었다. 아쉽게도 첫 직장에서 내가 기대하던 ‘좋은 선배’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좋은 동료는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첫 직장을 1년 정도 다니고 그만두면서 나는 '정말 좋은, 존경할 수 있는, 배울 점이 있는, 가르침 받고 싶은 선배를 만나고 싶다.'라는 욕구가 강하게 생겼다. (첫 직장이 별로였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래도 나에게 직장 생활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선배, 마음 맞는 동료, 함께 같이 성장하고 싶은 후배가 공존하는 곳. 신입이었기 때문에 동료와 후배에 대한 기대는 없었지만 적어도 선배에 대한 기대는 컸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선배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이직한 두 번째 회사. 영국계 금융권 회사였고 싱가포르 지사에서 Regional marketing manager로 일하게 되었다. 한국과 동남아의 마케팅에 대해서 담당했지만 오피스에는 사수조차 없었고, 영국 보스에게 보고해야 하는 체계였다.
외국계 회사는 다를 줄 았았는데... 좋은 Management 시스템을 가지고 좋은 사수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시차도 시차지만 역시나 이곳에도 내가 원한 좋은 선배는 없었다. 그렇게 두 번째 직장을 1년 조금 넘게 다닌 후 개인 사정으로 한국에 돌아오게 되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도 선배에 대한 갈증을 풀지 못했던 나였기에 세 번째 직장에서도 역시 좋은 선배를 만나는 것 그래서 내가 많이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이 가장 큰 고려 요소였다.
그렇게 다니게 된 엔터테인먼트 회사. 역시나 그곳에도 내가 기대하던 좋은 선배는 없었다. 이쯤 되니 좋은 선배가 있기는 한 걸까. 그리고 내가 정의하는 좋은 선배는 도대체 뭘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긴 한 걸까? 에 대한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은 선배를 만나고 싶다는 핑계로 방황을 합리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도 많이 했다.
그렇게 3번째 직장을 5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좋은 선배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직장을 돌아다닌 나에게 남은 것은 꼬여버린 커리어였다. 그리고 4번째 직장을 구하면서 면접 때마다 면접관들이 물었던 공통질문은 ‘이직이 왜 잦느냐’였고, 나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기에 바빴다. 4번째 직장을 다니고 있는 나는 여전히 좋은 선배와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지만 더 이상 그러한 갈증이 나의 선택을 좌지우지 하진 않는다.
4개의 회사를 다니면서 터득한 게 있다. 직장 내 내가 기대하던 '그런 사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동안은 이 욕심을 내려놓고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오랫동안 기대했던 것이었기에 사수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다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고, 슬픔이 공존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좋은 선배에 대한 갈증이 컸을까?라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몇 가지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첫 번째로는 창업했던 시절, 누구의 가르침 없이 광고 / 마케팅을 하면서 사실 이게 맞는 길인지, 클라이언트에게 괜찮은 제안인지 기준점이 없었다. 그래서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항상 이게 맞나? 질문의 연속이었다. 두 번째로는 나는 좋은 사수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나도 좋은 사수를 만나고 싶었다. 좋은 사수가 되어서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공유하고 같이 성장해나갈 수 있는 선배, 그리고 그러한 선배가 되기 위해서는 나부터 좋은 선배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 먼저였던 것 같다. 첫 번째 이유나 두 번째 이유 모두 배움에 대한 갈증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이유다.
배움에 대한 갈증이 만들어낸 ‘좋은 선배’에 대한 욕구
4번째 회사에서의 9개월 차 느낀 게 있다. 지금 회사에서 나는 검색엔진 최적화, 디지털 광고, 그로스, 데이터 분석, 서비스 기획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도적으로 일하고 있다. 어떠한 것들은 해본 적이 있지만 깊게 알지 못했던 분야도 있고, 어떠한 것들은 해본 적 없이 글로만 배웠던 분야도 있다. 지금 회사에서 누구 하나 위의 업무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기에 스스로 공부하고 깨달아야 했다.
해본 적이 있지만 깊게 알지 못했던 분야에 대해서는 더욱더 깊게 파며,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해본 적 없이 글로만 배웠던 분야에 대해서는 실제로 해보면서 이론과 실무의 간극을 극복해나가고 있다. 조직에 대한, 선배에 대한 나의 갈증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지만 커리어에 대한, 업무에 대한 만족도는 그 어느 때 보다 높다. ‘좋은 선배를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실패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로부터) 배움에 대한 갈증을 스스로 깨우쳐가며 갈증을 해결해나가고 있기 때문인지 좋은 선배에 대한 기대와 갈증은 많이 줄었다.